험한 일을 겪게 되면 주변의 사람들이 정리가 됩니다. 누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고, 누구는 겉으로는 웃는 낯을 가장하지만 결국은 등을 돌릴 사람이지 알게 되죠.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 '용수철 주무관 J'의 경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그분은 지난 1년 동안 P 바로 옆에서 겉으로는 항상 립서비스와 가식적인 웃음을 보였지만 이 모든 흉계를 은밀히 진행하고 있던 장본인이었던 거죠. 음모론이라고요? 처음엔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것이 점차 리얼 다큐가 되어 버렸네요.
사무보조원 분들 중에서도 정말 많은 도움 주시고 좋은 분들도 많습니다. 단 한 번의 꾸중으로 P를 감사과에 고발한 사무보조원 Y도 처음엔 그런 분인 줄 알았죠. 하반기 9~10월 경 업무 관련 지적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해당과에서 그 어떤 직원보다 P와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였죠. 비록 계약직 직원이지만 P는 Y를 정규직과 차별 없이 대했고 자신의 속마음도 터놓곤 했지요. 상반기 편향적인 감찰로 P가 중앙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했었던 사정도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더 감사과와 인사과의 부당한 조치에 분개했었죠. 일부직원들의 간식 관련 갑질 괴롭힘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P의 입장에서 공감해 주고 위로하며 안아 주기도 했던 Y였어요. 직원들에 대한 자신의 불만도 가감 없이 p에게 털어놔 P가 달래주느라 당혹스럽기도 했고요. 상반기 내내 '용수철 J'가 P에 대한 불만과 앙심으로 P를 감시하고 욕을 할 때 "어떻게 같은 동료 직원으로서 그럴 수 있냐?""도대체 애 엄마가 왜 저렇게 심보가 고약하냐."며 엄청 화를 내기도 했었죠.
그렇듯 사무보조원 Y와 P는 친밀한 관계였기에 사무보조원 Y는 주말에도 같이 시간을 보내자며 P에게 연락을 해오기도 하고, 자신의 집에 초대해 그의 집에도 놀러도 가고, 점심 때면 함께 멀리까지 브런치를 먹으러 가기도 하던 사이였죠. 그래서 시간이 맞으면 퇴근 시에 자기 차로 지하철 역까지 P를 데려다주었던 거고요. 그랬던 Y가 12월에 돌변해서 자신이 원해서 태워준 게 아니라며 차량 동승을 '갑질 부당행위'라고 감사과에 P를 고발하다니요. 정말 속마음까지 터놓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는 그 배신감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거예요. 이 사무보조가 자신을 배신할 줄을 꿈에도 모르던 P는 감사받기 직전까지도 Y에게 면접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서류를 챙겨주기도 했죠. 또 업무 격려차원에서 맛있는 밥도 사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P가 느낀 배신감과 환멸은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심리적 것이었죠. 쉽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오랜 치료가 필요한 쓰라린 고통으로 남을 것입니다.
한편, 요즘 공무원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는 이른바 'MZ 세대' 공무원들은 보통 자기주장이 강하고, 불의에 눈감지 않으며, 정의와 공정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경직된 조직문화와 구태의연한 갑질 문화에 반발하며, 위계적 질서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죠. 당연히 우리 조직에도 요즘 이런 소위 'MZ 세대' 직원들이 늘어났고요. 그래서 P와 함께 중앙에서 근무했던 이런 젊은 직원들은 P가 겪은 갑질 괴롭힘에 공분했고, 구태의연한 조직문화에 집착하는 꼰대 같은 상사에게는 'MZ의 매운맛'을 보여주겠다며 용기 있는 목소리로 응수하기도 했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P가 근무하던 J과에는 이런 '매운맛 MZ'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웠죠. '용수철 J 주무관'처럼 비록 나이는 80년대에서 90년대 이후 생이니 'MZ 세대'인 것은 맞았지만 의식은 MZ는커녕 오히려 더 꼰대스러웠고, 성인지 감수성도 오히려 떨어지더군요.
P가 집요한 '감사 갑질'에 의해 중앙에서 부당하게 '추방'되고 제가 이 사건을 사내 게시판에 공론화했을 때에도 그 많던 MZ들은 오히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더군요. 마치 새벽이 오기 전까지 예수를 3번 부정하던 베드로처럼 이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모습이었죠. 고질적인 간식 갑질과 괴롭힘, 힘없는 서무에 대한 무리한 요구에 대해 비판적이던 'MZ세대' 직원들의 적극적인 의견개진이나 공개적인 공감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그 날카로운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죠.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나 요구가 부정되는 것은 참지 못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타인의 정당한 권리나 요구가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것에는 쉽게 눈을 감아 버리는 한계를 보이더군요. 개인주의 성향이 몸에 밴 탓에 정의를 위한 연대나 참여 같은 것은 꿈꿔 보지도 못하는 모양새였고요.
오히려 조금 세대차이가 나는 분들이 멀리서도 공감해 주고, 이 사건의 부당함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주는 모양새였습니다. 가까이 있는 분들보다 오히려 멀리 있는 분들이 격려를 아끼지 않고,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달라고 응원을 아끼지 않더군요. 저희와 오래 알고 지내던 분들 뿐만 아니라 우연한 계기로 잠깐 같이 일한 경험이 있거나, 함께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분들마저 멀리서 격려와 응원을 보내왔어요. 이런 걸 보면서 참 세상은 알 수 없는 묘한 경이로움이 가득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P와 함께 일선에서 선거를 치렀던 모 국장님은 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시고는 "상반기에 자신에게 연락했으면 자기가 데려왔을 텐데, 왜 연락을 안 했냐면서, 도움이 못 돼줘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다."는 말씀을 전하기도 했죠.
끝까지 진상을 규명해 억울함이 풀리기를 바란다는 격려를 보내주는 직원도 있고, 저와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직원 분이 지나치며 "힘내세요."라고 격려와 눈웃음을 보내 주시기도 했죠. 반면에, 오랜동안 알고 지냈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 예전에는 저에게 '형님, 형님'하던 인사과에 근무하는 입사 동기는 여느 때처럼 평어를 쓰는 저에게 갑자기 돌변해 '반말(평어) 하시면 감사과에 신고할 수 있다'는 황당한 협박을 하기도 하고, 제가 보내는 메신저나 메일에는 일절 무응답으로 무시하기도 하더군요. 이 입사동기뿐만 아니라 한 때 중앙에서 같이 근무했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직원들 중에 일부 직원들도 이번 일이 터지자 마치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며, 제가 보내는 메일이나 메신저는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분들도 더러 있더군요. 이런 인간 군상들의 깜찍한 모습을 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은 험한 일을 겪어 봐야 정말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영어 속담은 바로 이것입니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