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의 야경에 그다지 감흥이 없는 편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도시지만, 서울 시민인 내겐 일상의 장소인 데다 우연찮게 지금까지 일했던 회사들 사무실이 다 10층 이상 건물에 있었어서 풍경을 내려다본 들 빨리 집에 가고 싶을 뿐. 어둠이 깔리면 번쩍거리기 시작하는 서울의 빛들은 야근하는 직장인들의 한이 맺힌 조명이요, 꽉 막힌 도로 정체로 괴로워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외국으로 여행 나가면 일단 놀러 온 거니까 모든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고, 해가 지고 나면 빛을 발하는 랜드마크들에 환호성을 지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도쿄도 참 큰 도시라, 야경으로 유명한 전망대들이 몇 군데 있다. 우선 '도쿄 타워'. 높이 333m의 쇼와 시대에 지어진 이 철탑은 여전히 내게 도쿄의 상징처럼 보인다. 뭔가 클래식 로맨틱의 대명사 같달까, 스카이트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높고 상징적이었던 전망대. 그리고, 오픈 이후부터 주욱 전망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스카이트리'가 있다. 건물 높이 총 634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손꼽히며(전망대가 있는 층은 물론 이보다 낮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에서 도쿄로 상경/여행 온 지방 사람들에게 '스카이 트리는 봤어?'라는 대사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지금 도쿄의 손꼽히는 명소다. 그리고 최근에 오픈한 '시부야 스카이'도 인기다. 시부야 스카이는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건물의 고층부에 있는데, 이 건물의 높이는 200m 대로 도쿄 타워나 스카이트리보다 낮지만 탁 트인 옥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내려다보는 시부야의 전망이 대단하다. 전파탑, 송신탑으로 분류되는 도쿄 타워, 스카이트리와 달리 시부야 스카이는 상업빌딩 옥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건물 내부의 쇼핑몰(+인파 미어터지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구경하다가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인기 있는 명소들이 대부분 그렇듯, 원하는 시간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티켓을 예약해두어야 한다. 예약 사이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망대들의 티켓 가격도 2000엔 이상. 특히 요즘 인기인 시부야 스카이의 일몰을 노린다면 한 달 전에는 예약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이렇게 화려한 야경 스팟들이 많지만, 내가 가봤던 가장 인상적인 도쿄 야경 스팟은 의외로 신주쿠에 있는 도쿄 도청 전망대다. 약간의 추억 보정이 된 순위이긴 하지만.
운영 시간 : 9시 30분~22시 (매월 첫 번째, 세 번째 화요일 휴관)
나는 도쿄 여행을 가면 보통 신주쿠 지역에서 머무른다. 신주쿠 루미네 지하에서 배부르게 라멘을 먹고 소화시킬 겸 걷다가 야경을 보러 도쿄도청 전망대를 가보기로 했다. 도쿄도청 제1본청사 45층 높이에 위치한 무료 전망대. 12년 전에 친구와 함께 왔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이 한적했다. 3월 말에 방문했더니 전망대 가는 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서 한동안 서서 벚꽃 구경도 했다. 낮에 방문했던 신주쿠 중앙 공원에서는 벚꽃들이 지기 시작해서 아쉬웠는데, 지나가던 길에 이렇게 멋진 벚꽃을 볼 줄이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날의 밤이었는데도 벚꽃은 참 이뻤다. 도청 부지라서 특별히 조경을 더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쿄도청에 도착하면 전망대 안내 사인이 있다. 그 사인을 따라 들어가면 관리인분이 소지품 확인을 하고 내부로 들여보내준다. 금요일 밤 8시 정도였던 데다 유명한 유료 전망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어서 바로 안내해 주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가 있는 45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202미터 정도 되는 높이라고 한다. 45층에 올라와서도 내부가 한산해서 맘껏 돌아다니며 원하는 대로 오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이 많지 않고, 그나마 방문객들도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용하기도 했고, 한국어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아 오히려 어색했다. 올해 방문했었던 오사카의 유명한 전망대인 공중정원, 아베노하루카스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꽤나 줄을 서서 기다렸다 입장했고 사람들에 떠밀려 다녔었는데. 스카이트리나 시부야 스카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자연스레 이곳과 비교가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특유의 들뜬 분위기가 좋을 때도 있으니 그것은 취향의 영역인 것으로. 웬만해선 붐비지 않는다는 것이 이곳 전망대의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카페도 문을 닫은 채였다. 기념품 구경은 하고 싶었는데!
45층에 들어서서 창밖을 바라보니 12년 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와 그다지 변한 게 없구나. 이곳 전망대에서는 잘 정돈된 도쿄 제일의 오피스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360도로 뱅글 걸어 다니며 야경을 보는데 질리지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남서부 방향에서 보는 야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번쩍이는 고층건물과 상대적으로 빛이 없는 넓은 공원이 대비되는 것도 좋았고. 하지만 사진을 열심히 찍어도, 유리에 내부 조명이 반사되어서 실제로 보는 것만큼 예쁜 사진은 안 나왔다. 역시 좋아하는 풍경은 내 눈으로 진득하게 보고 머릿속에 남기는 게 최고인가 보다.
전망대 주변의 유명하고 상징적인 건물은 안내판에 설명이 나와있는데, 여기 보이는 저 건물이 어떤 건물이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스미모토 빌딩이라든지 신주쿠 미츠이 빌딩이라든지, 나도 들어본 적 있는 유명 대기업 건물들. 역시 야경에 일조하는 것은 고층 오피스 빌딩이라니깐. 일본인 취업 준비생이라면 이 근방의 건물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까나 하는 생각을 했다. 뭔가 출세의 냄새가 나는 풍경이라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망대에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 화려함이 이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뭔가 허무한 감상이 들었다. 이쯤에서 일본 시티팝을 BGM으로 깔아주고 싶은 기분.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가 좋겠다. 시티팝이 일본 버블 시대의 상징과도 같다고 하던데, 차가운 초봄 공기 속에서 반짝이는 건물 조명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살아보지도 않았던 1980년대 일본 밤거리가 떠오르면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낭만적인 경제적 번영기를 그리워하게 된달까. 태생적으로 노동해야 하는 직장인이라 그런 걸까나.
https://www.youtube.com/watch?v=T_lC2O1oIew
내게 신주쿠의 이미지는 JR신주쿠 역 근처의 선술집이 모인 오모이데 요코초와 도쿄의 대표 유흥가 가부키초, 대형 백화점들이 즐비한 왁자지껄하고 인파로 붐비는 그림이었는데, 도쿄 도청 쪽은 오히려 좀 차분하다. 공공기관 주변이라 길도 널찍하게 정돈되어 있고 대기업 건물과 좋은 호텔이 늘어선 곳. 그래서 이곳의 야경은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화려함이 넘실거리는 도시의 풍경이 보고 싶다면 전망대를 내려와서 신주쿠의 호텔까지 가는 길에 즐기면 되겠군 싶었다.
한참 여유롭게 돌아보고 한층 아래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전망대를 내려왔다. 화장실도 깔끔했고, 이용객이 없어서 조금 무서웠을 지경. 도쿄 도청 전망대는 신주쿠에 있어서 위치적으로도 방문하기 쉽고, 무료인 데다 잘 관리되고 있는 전망대이니, 시간이 나면 방문해 보는 걸 추천한다. 후지산과 도쿄타워를 보고 싶다면 날씨 좋은 날의 낮에, 빛이 나는 야경이 보고 싶다면 저녁에.
올해 11월 도쿄에 갔을 때는 오다큐 호텔 센추리 서던 타워에 머물렀다. 이곳은 JR 신주쿠역, 신주쿠 버스 터미널과 지척이고 바로 앞에 다카시마야 백화점이 있다는 것이 장점인데, 또 하나의 메리트는 객실 내 통창이다. 이 호텔은 고층 건물의 20층에 로비가 있고, 22층부터 35층까지를 객실층으로 쓴다. 고층 객실+통창은 뷰 맛집을 보장하지!
나는 싱글룸에 머물렀는데 객실 넓이가 19제곱미터로 아담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면에 통창이 나 있었다. 34층 객실을 배정받아 그런지 창을 통해서 가까이는 신주쿠 공원, 멀리는 도쿄타워까지도 잘 보였다. 바로 맞은 편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건물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 여행에서는 특별히 도시 야경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객실 두 면이 통창인파노라마 룸도 있다고 하던데 거기서 보는 탁 트인 전망은 또 얼마나 멋질까!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숙소를 찾는다면 이 호텔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