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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an 28. 2024

도쿄 여행의 특별히 좋았던 순간들

문구 덕후를 유혹하는 긴자 이토야 문구 본점


 문구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던 곳, 이토야 문구. 긴자에 이토야 문구 본점이 있는데, 무려 12층짜리 건물이다. 11월에 방문해서 그런지, 1층에서부터 연말연초를 타깃으로 한 카드와 편지지들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심플한 디자인에서부터 아주 유난스러운 것까지 종류도 다양했는데, 눌렀을 때 엔카가 흘러나오는 카드를 보고는 어렸을 때 좋아했던 멜로디 카드가 생각났다. 요즘은 편지든 카드든 쓸 일이 잘 없는데, 이곳 카드들을 보니 연하장이라도 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토야 문구 입구
인테리어가 너무 내 취향이야
영업시간과 층별 안내
다양한 카드 종류들

 

 이곳에서 취급하는 제품들은 카드, 편지지, 만년필, 펜, 스티커, 수첩과 같은 일반 문구류부터 키친 다이닝 제품 같은 리빙케어 잡화, 물감이나 패브릭 같은 컬러 제품, 공예 제품 등 다양하다. 층별 안내를 참고하여 이동하면 도움이 될 듯. 건물의 높이에 비해 한 층의 넓이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영리하게 디스플레이된 제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각 아이템별 전문점과 비교하면 물건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한 번에 다 모아둔 문구 백화점 느낌이라 문구 쇼핑을 마음먹었다면 이곳에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미술 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색연필이나 물감들이 색깔 팔레트에 맞게 정렬된 걸 보는 걸 좋아하는데, 7층에서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컬러링 제품들을 보고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컬러가 그라데이션 되듯 정리되어 있는 걸 보면 심신의 안정이 든달까. 거기서 좋아하는 색깔을 찾아보는 것도 정말 즐거웠다. 어렸을 때 파스텔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는데, 파스텔 제품들도 놓여있어서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물감들
이런 거 너무 좋아
포장지 종류도 다양했다


 나는 만년필도 좋아해서 가성비 좋은 라미 제품을 몇 개 사서 쓰고 있는데, 이 곳의 만년필 잉크 종류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 디즈니 100주년 기념 잉크들이 있었는데 잉크 이름도 디즈니 작품 이름이었고(어울리는 색깔과 작품을 절묘하게 매칭했다), 색감 테스트 문구도 각 작품을 연상케 하는 문구들로 쓰여있어 이런 섬세한 연출에 오타쿠는 또 감동했다. 잉크 이름 '신데렐라'는 푸른 먹색으로 '12시의 마법‘,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밝은 분홍색으로 ‘언젠가 꿈속에서’. 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다만 가격이 20ml에 2,420엔으로 비쌌다. 라미의 잉크 카트리지도 있었는데 종류가 너무 한정적인 데다, 후다닥 쿠팡 가격과 비교해 봤는데 더 비싸서 구매하지는 않았다. 이토야의 제품들은 귀엽지만 가격은 귀엽지 않은 듯…

 

귀여운 패브릭 제품들
만년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디즈니 100주년 기념 만년필 잉크, 이런 걸 보면 다 사 모으고 싶어지는 오타쿠


 뿐만 아니라 전등이나 포크, 수저받침, 우드 브로치, 스탬프 등 눈이 가는 귀여운 소품들이 많았다. 생필품은 아니지만 ‘아, 갖고 싶다~’ 싶었던 아이템들의 집합소. 파손의 위험과 무서운 가격으로 자제했지만. 일본풍의 디자인이나 소재의 제품들도 많고 일본종이(和紙) 종류까지 있어서 일본여행 기념품을 구매하기에도 좋을 듯싶었다.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구경하다가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도 작은 스티커와 엽서 몇 종류만 골랐다. 워낙 사람들이 붐비고 매장이 넓지는 않다 보니 사람들에 치여가며 구경하는 게 불편했는데, 결제하는 줄도 상당히 길었다. 툴툴 거리며 기다리는 줄을 서면서도 근처에 디스플레이된 엽서며 스티커에 눈이 돌아간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역시 이토야, 마지막 순간까지 귀여운 아이템들로 고객의 주머니를 노린다.. 고른 것들을 계산하고 돌아서는데 내 뒤에 서 계셨던 어머님이 나를 부르셨다. 무슨 일이지 하고 보니 내가 그날 오전에 신사에서 뽑았던 오미쿠지를 떨어뜨려서, 어머님이 주워주셨던 것. ‘소중한 거지요?’ 하시면서. 복작거리는 계산대에서 따스한 인류애를 느꼈다.  문구류를 좋아한다, 일본풍의 아이템들을 구경하고 싶다 하는 사람들은 꼭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이런 다이닝 제품도 정말 귀엽다
귀여운 우드 브로치
귀여워….
내가 산 엽서와 스티커들




2. 카구라자카(가구라자카)의 라비앙로즈


 카구라자카가 리틀 파리라고 불린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 프랑스어 학교와 프렌치 레스토랑이 많아서 그렇다고. 리틀 파리라 불리는 곳이지만 과거 게이샤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해서, 에도 시대 느낌과 파리 느낌을 겸비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다. 요즘에는 게이샤들이 있는 요정이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 워낙에 폐쇄적인 분야라 나는 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게이샤나 마이코는 한 번도 못 봤지만. 그래도 납작한 돌이 깔린 길이라든지 생활감이 묻어나는 채소가게, 당고며 전병 같은 군것질 거리를 파는 곳,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뭉쳐서 자아내는 분위기가 번잡한 시부야나 긴자 같은 곳과 사뭇 달라 좋았다. 여행하면서 길거리에서 느껴지는 정취나 향수, 낭만을 동경하는 나는 하라주쿠처럼 인파가 넘쳐나는 곳에서는 이리저리 휩쓸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데 이곳은, 특히 평일의 카구라자카는 예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 나는 가쿠라자카 역에 내려서 아카기 신사를 구경하고 이다바시 역 쪽으로 걸었다. 약간 흐린 하늘조차도 이곳의 낭만적인 분위기에 일조하는 것 같았다.


카구라자카의 아카기 신사
소담한 상점가의 분위기가 좋았다


 상점가를 걷다 눈에 보인 작은 전병 가게에 들어가서 작은 전병 두 개를 샀는데, 주인아저씨가 말을 걸어주는 것도 좋았다. 프랜차이즈 가게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접객.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어떻게 카구라자카까지 왔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카구라자카가 정말로 예쁜 동네라고 하는 자랑도, 갑자기 날이 굉장히 추워졌으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조언도 다 혼자 여행하는 내게 딱 좋은 오지랖으로 다가왔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려고 영어를 많이 섞어서 이야기하다가, 내가 일본어로 하셔도 된다고 하니 어떻게 일본어 공부도 했냐며 호들갑을 떠셨다. 뭘 많이 산 것도 아닌데 만난 지 5분 만에 '나 이 가게의 단골인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할 정도로 친근한 대화. 덕분에 이 동네의 이미지가 더욱 좋아졌다.


 칼바람 불던 날이었는데 아저씨랑 수다를 조금 떨고 나와서 나오니 마음이 따끈해졌다. 헤드셋을 쓰고서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헤드셋을 벗고 보니 길가의 가로등에 있는 스피커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멜로디인데?' 하다가 퍼뜩 떠오른 제목 'La Vie en rose'. 나는 이 곡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기분 좋고 감성적인 선율이 흐르면서 느껴지던 조금 차갑고 버석한 공기와 흐린 하늘의 감각. 여행하다 보면 음악으로 순간이 기억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토록 예상 못한 순간의 낭만적인 길거리라니! 재미있는 건 다른 사람들은 음악이 흐르는 것에 아랑곳 않고 각자 할 일 하고 있었다는 것. 음악소리에 감동한 관광객은 나밖에 없었나 보다. 리틀 파리 카구라자카, 라비앙로즈가 주제가 정도 되는 동네인가. 이런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니, 이 동네에서 잠깐 살아보고 싶어졌다.


흐린 하늘조차 분위기 있어 보였던 카구라자카의 골목


+ 비 그친 밤에 JR 신주쿠 역 앞을 지나는데 기타 하나 매고서 버스킹 하는 청년들을 봤다.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비슷한 느낌의 노래를 하고 있었다. 추웠던 날씨 탓에 지켜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웃으면서 노래하는 모습에 '이게 청춘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벅차올랐다. 역시 여행지에 음악이 입혀지면 더욱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3. 하세데라의 꽃

  

 내 가마쿠라 여행의 가장 사랑스러웠던 순간은 3월의 하세데라에서 꽃구경을 한 것이었다. 후자사와 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11 정거장 가면 하세역에서 내릴 수 있는데,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하세데라라는 절에 도착한다. 참고로 사슴 천국인 '나라'에도 동일한 이름의 절이 있는데, 같은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하세역에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나는 에노덴 '이나무라가사키' 역에서 내려 해변가를 따라 산책하고 하세데라로 가는 코스를 더 추천한다. 3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데, 해가 좋은 날에는 반짝이는 바다의 윤슬을 보며 걷는 기분이 끝내주기 때문. 이나무라가사키 곶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후지산도 볼 수 있다.


이나무라가사키 곶에서 바라본 후지산
가마쿠라의 바다는 평화롭고 예뻤다
하세데라 입구의 소나무


 하세데라 입구에서부터 멋진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입장료는 400엔. 규모가 아주 큰 절은 아니지만 본당을 비롯해 본당 옆 커다란 벚나무, 조경이 멋진 호수, 일본식 정원 등 구경거리가 알차다. 이곳은 3월과 11월, 두 번 방문했는데 3월에 가서 느꼈던 첫인상은, ‘수수하네’였다. 푸릇해지기 시작한 나무, 만개했다 지기 시작한 꽃망울들이 보였고. 그다지 붐비지 않아서 더 좋았다. 입장해서 본당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니, 이 절의 본격적인 매력이 드러났다. 본존인 9미터가 넘는 커다란 목조 불상이 박력 있었고, 전망대 쪽으로 가니 가마쿠라의 야트막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거기다 커다란 벚꽃나무가 연분홍 벚꽃 잎을 날린다. 3월 말이어서 벚꽃은 많이 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바람결에 휘날리는 벚꽃 잎이 금욕적인 느낌마저 드는 정갈한 색감의 본당 앞을 수놓는 모습은 절경이었다.  수수하다는 인상 취소. 이곳은 가마쿠라의 빼어난 보물이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언뜻 봐도 정성을 들여 잘 가꾼 정원, 알록달록하게 피어오른 꽃들. 그리고  뭔가 수상해 보이는, 지브리의 영화에 나올 법한 도리이 너머의 동굴까지. 신비로운 경험을 한 것 같다. 방문했던 날 꽤나 흐렸던 하늘의 구름이, 하세데라를 쭉 돌다 보니 점차 파랗게 개었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보니 흐렸던 때와 또 다른 이곳의 매력이 느껴졌다. 신비했다가 청순했다가. 그냥 방문해 본 절이었는데 이렇게 홀딱 반하게 될 줄이야.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조용하고 평화로웠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저 도리이 너머 뭐가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어떤 꽃은 피기 시작하고 어떤 꽃은 지기 시작한다
너무도 이뻤던 꽃송이들


 이곳은 초여름의 수국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3월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본당의 커다란 벚꽃나무도 예뻤지만, 내가 더 맘에 들었던 것은 잘 가꿔진 연못가의 꽃.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에서 진한 분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홍빛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가녀린 꽃잎이라니. 찾아보니 풀명자 같기도 했는데, 정확한 나무 이름을 알지 못해 슬펐다. 아무튼 봄의 위력은 이런 것인가 보다. 서정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자연의 힘. 또 방문하고 싶어지는 소중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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