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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Feb 11. 2024

나의 일본 친구들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험 목적의 공부가 아니라 일본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일본 여행을 다니면서 일본어를 다시 시작한 거라서,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말해보고 싶어 졌기 때문에. 오타쿠 일본어 특징이 듣기, 말하기가 월등하고 읽기 쓰기는 문맹 수준인 거라는데 내가 딱 그 노선이다. 말하고 듣는 건 즐겁지만,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일본어로 글을 쓰는 건 소통하는 건 힘들다.


 딱히 일본어를 전공하거나 일본어 학원을 다니거나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 일본인이 없었다. 여행지에서 사귀기엔 은근히 낯가림이 심한 나로서 너무도 힘든 미션. 하지만 내게도 우연히 친해져서 꽤나 오래 교류하고 있는 일본인 친구가 두 명 있다.


챔피언!


 츠바사는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만났다. 한참 메시와 바르사에 빠져있던 나는, 2018년에 캄프 누에서 엘클라시코 직관이라는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여행 중이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나의 영웅들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메시, 이니에스타, 수아레즈, 피케. 그 감동적인 엘클을 보고, 비야레알전까지 야무지게 직관한 나는 꾸레로서의 군기가 빡 들어가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훈련한다는 도심 외곽의 훈련장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트램 타고 버스 타고 힘들게 찾아간 Ciutat Esportiva Joan Gamper(호안 감페르 구장). 심지어 외부인은 이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연습하는 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메시의 출퇴근길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찾아갔다. 여행지에서의 소중한 하루지만 몇 초라도 메시를 볼 수 있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캄프누 가서 너무 신난 꾸레
짜릿했던 엘클의 밤

 

 오타쿠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파란 아우디를 타고 출퇴근하는 메시를 봤다. 이니에스타도 봤다. 호안 감페르 구장도 출입구가 여러 개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다른 출입구로 다닌다면 놓쳤을 텐데. 운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착하게 살겠습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날뛰고 있는 나를 포함한 오타쿠 무리에 츠바사가 있었다. (경기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면 나와 비슷한 팬들끼리 모여서 가벼운 인사정도는 나누게 되며 옅게나마 유대감이 생긴다)


호안 감페르 구장

 

 츠바사는 바르셀로나 유학생이었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왔다고 했다. 그녀는 오사카 출신이었고, 축구를 아주 좋아하고, 특히 메시의 팬인데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찾아왔다고. 그때 당시 나는 초급 일본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메시를 기다리는 동안 츠바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페인어를 어떻게 배우게 되었냐고 물어보는 내 질문에, 츠바사는 메시에게 사랑 고백을 하기 위해서라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오사카 출신, 대범한 발상이 남달랐다. 그 말에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스페인어와 카탈란을 외워서라도 메시에게 사랑 고백을 하리라 다짐했고, 실제로 한동안은 스페인어에 매진해 바르사 응원가도 몇 개 외웠다. 의지를 가진 오타쿠가 이렇게 무섭다!


 쌀쌀한 날씨에 종일 호안 감페르 구장 밖에서 함께 있었던 덕분인지, 같은 별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참 가깝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나의 첫 번째 일본인 친구다. 사실 그날 이후로는 만난 적이 없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여전히 서로 연락한다. 지금 그녀는 군마현의 대형 유통회사에서 영업일을 하고 있다. 한국의 트렌드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는지, 한국에서 유행하는 아이템이나 디저트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근처에 온다면 사양 말고 꼭 연락해 달라는 츠바사는 정말 열정적이고 다정한 친구다.


나라의 상징, 사슴


 또 다른 일본인 친구, 미키코는 언어교환어플에서 만났다. 나는 어플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는 걸로 설정해서 활동했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은 미키코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어플에서 친구 사귀기를 시도한다면 어플 특성상 언어를 구실로 여자/남자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많은 건 감안해야 할 듯. 프로필에 연애목적 아님 이런 걸 써두면 약간의 방어는 된다) 또래에 관심사가 비슷한 동성의 친구를 만나면 언어 공부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나는 일본어로 말하고 상대방은 한국어로 말하는 식. 다만 얼굴을 본 적 없이 앱 메신저로만 소통하다 보니 오래도록 연락하며 지내기는 어려운데, 미키코와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어플 메신저 말고 라인으로 이야기하자고 의기투합했던 케이스다.


 미키코는 나라에 사는 친구다. 한국의 음식과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미키코를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오사카 여행을 갈 일이 생겼고, 오사카와 가까운 나라에도 가 볼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더니 미키코가 반색을 하며 만나자고 해주었다. 나라는 고등학교 때 가보고 정말 오랜만에 가보는 거였는데, 현지 사람과 함께 여행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동대사 가는 길에 사슴이 정말 많다 ㅋㅋㅋ


 긴테츠 나라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열차에서 내렸는데, 역시 나라는 사슴의 도시, 여기저기 사슴 조형물과 나라의 마스코트 센토군이 있었다. (센토 군은 정말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비주얼이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뒤에서 쓱 미키코가 다가왔다. 미키코는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언니였다. 그리고 엄청난 간사이 사투리를 썼다. 일본어를 표준어(?) 위주로 공부하고 있던 내 귀에 간사이 사투리는 정말 귀엽게 들렸다! 메신저로 대화만 하던 친구를 직접 만나본 것도 처음이라 떨리기도 했다.


나라의 마스코트, 센토군과 시카마로군

 

 미키코는 쾌활하고 잘 웃고 멋진 사람이었다. 농담하는 것도 좋아하고, 일본 방송에서 나오는 호쾌하고 재미있는 간사이 사람의 전형 같았다. 사슴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는 나를 보고, ‘흠, 사슴이 사슴이지 뭐, 특별할 건 없어. 가까이 다가와도 너무 놀라지 마.‘ 하더니 사슴을 무슨 강아지처럼 엄청나게 쓰다듬질 않나, 사진도 많이 찍었다. ’너 사슴에 시큰둥하더니! ㅋㅋㅋ‘ 하고 놀렸더니 ’아니, 내가 너무 호들갑 떨면 네가 질릴까 봐.. 사실은… 나도 사슴 별로 본 적이 없어!!너무 신기하다 너무 귀엽다!!’ 하던 미키코. 알고 보니 핸드폰 배경화면도 사슴이더라. 나라의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사슴이 내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나라에서 사슴은 거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미키코를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뭐라도 내놓으라고 달려들던 갱스터 사슴들, 미키코가 구해주었다 ㅋ


 간사이 사람의 손님 접대 규칙인지 동대사 구경하는 것도, 점심으로 먹었던 오코노미야키도 모두 미키코가 사주었다. 얻어먹기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고 디저트는 내가 사겠다 우겨서 고구마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서로 선물도 준비해 왔었는데, 나는 친구에게 신세 지기 때문에 당연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키코도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 오니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 부분에서 뭔가 나와 정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럭스토어에서 요즘 인기 있는 것들을 몽땅 가져온 듯한 미키코의 선물꾸러미를 보고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나는 립글로스를 비롯한 한국 화장품을 준비해 갔었는데 미키코가 정말 좋아해서 기뻤다.


정말 맛있었던 고구마 아이스크림
다루마(?)같은 오미쿠지도 같이 뽑았다!

 

 나라에 다녀오고 반년 정도 뒤에는 미키코가 서울에 놀러 왔다, 같은 회사 다닌다는 후배를 데리고!  나라에서 받은 호의를 갚을 기회라 생각해, 휴가를 내고 홍대에서 만났는데 그녀들은 한국 현지의 치킨이 궁금하다고 해서 근처 치킨집으로 갔다. 미키코의 후배는 한국 아이돌 팬이었고, 치킨집에 흘러나오는 한국 아이돌들의 노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도 잘 모르는 최신곡들이라는데. 문화의 힘이 역시 대단하군 싶었다, 지금 일본의 젊은 친구들은 너무나도 쉽게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를 접하고 거기에 빠진다. 그리고 서울에서 귀여운 디저트 카페에 가고, 닭 한 마리와 간장게장을 먹고 싶어 한다. 자연스레 한국어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츠바사와 미키코를 만나면서 배웠던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일본에서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무슨 관계인지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아이바 마사키’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성이 아이바, 이름이 마사키다. 우리나라는 성씨의 종류가 그리 다양하지 않지만(김, 이, 박 씨가 정말 많으니까), 일본은 이름 종류만큼이나 성씨의 종류도 많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성씨로 부른다.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직장 동료, 잘 모르는 사람끼리는 성에 존칭을 붙여서 부른다. ‘아이바 마사키’를 ‘아이바상’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  같은 반 친구인 경우에도 교류가 많지 않으면 아이바상이라고 불러야 한다.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새 교실에 배치되고 나서 만나는 동갑내기 친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을 부르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다. 내가 연상인 경우, 직장 상사인 경우에는 주로 ‘아이바’ 혹은 ‘아이바 군’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더 친해지면 이름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친하다고 해도 갑자기 막 이름을 부른다기보다, 기본적으로 서로 간의 암묵적인 합의를 거치는 듯하다. 흔히 말하는 요비스테다(呼び捨て). ‘마사키’라고 부르거나, 애칭처럼 부르는 것도 가능해진다. 아이바’를 ‘아이밧치’, ‘아이바쨩’으로 부른다든지 ’마사키쨩‘이라고 부른다든지.


 ‘ ~쨩’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린애들한테만 그렇게 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40대 성인 남성이라도 내가 그 사람과 막역한 사이면 ~쨩이라고 부르더라. 잘 모르는 사이인데 냅다 일본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애칭을 부르게 되면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거리감을 확 좁혀오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츠바사, 미키코와 확 친해지게 된 계기도 요비스테다. 평소 알던 사이가 아니고 갑자기 만나게 된 일본인 친구와는 호칭 정리가 필요하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하고 물어보았을 때, 두 사람 다 단번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이름에 ~상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름으로! 단숨에 거리감이 확 좁혀진 기분이었다. ‘나를 이렇게 까지 친하게 생각해 준다고?’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일본어 특징 중 또 다른 하나가 존경어와 반말의 구분이 확실하다는 것.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보통 처음 보면 경어를 쓴다. 그런데 경어를 쓰는 건 표현이 참 어렵다. 츠바사의 경우에는 서로 경어로 이야기하다가, 내가 경어 표현을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츠바사가 먼저 반말하자고 해주었다. 츠바사가 나보다 어리기도 해서 ‘그럼 그럴까?’하고 덥석 그 제안을 물었다. 미키코는 나보다 언니여서 한참을 서로 경어로 소통하고 있었는데, 메신저로 존댓말 치고 있자니 너무 길기도 해서 ‘혹시 괜찮으면 우리 서로 말 놓을까?’ 했더니 ‘드디어 말해줬어! 기뻐’ 했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말 놓으라고 했으면 좋았잖아.. 하니까 그런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단다. 배려심이 과하다.


 일본어를 공부한 뒤로 일본 콘텐츠를 자막 없이도 이해하게 되고, 일본 여행을 가서는 현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니 그게 기뻐서 계속 공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더 어려운 일본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본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용기 내서 말을 먼저 걸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선순환 고리 속에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을, 여행에서의 새로운 경험도 시도할 수 있는 배짱이 생기는 듯하다. 작은 식당에서 메뉴에는 없는 주방장 특선 요리를 주문해 본다든지, 귀여운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키링을 달고 있는 일본 사람에게 그 키링 어디서 구했는지 말을 걸어 본다든지. 나는 아무래도 현지 사람들과 수다를 조금 떨어줘야 기쁜 여행객인가 보다.


단풍 구경가서 먹은 말차와 떡

 

 맛있는 것을 잔뜩 먹겠다, 한국에서 못 구하는 레어템을 쇼핑하겠다, 한적한 일본 시골을 탐험해 보겠다, 애니메이션에 나온 곳들을 성지순례해 보겠다 등등 누구나 자신의 일본 여행의 기준이 있을 거다. 좋아하는 걸 맘껏 즐기는 일본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자가 내게 끝없이 시련을 줘도 일본어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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