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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Oct 29. 2019

시골 살이에 대한 갈망의 시작

 책을 덮자 다시 답답함이 몰려왔다. 일본 작가의 이탈리아 중부지역 농가 민박 체험에 대한 에세이였다. 네그레제, 로카도르차 등 처음 들어보는 이탈리아의 시골에서 느긋하게 머물면서 와인과 치즈를 맘껏 먹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대리 만족했던 것도 잠시, 이야기가 끝나면서 그 위안도 끝나버렸다. 이건 그녀가 겪은 아름다운 경험담일 뿐 내 이야기는 아니니까.


 2019년, 갑작스레 오른쪽 귀에 돌발성 난청을 앓게 되면서 나의 생활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가장 우려했던 청력 저하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고주파 영역의 난청은 회복이 되지 않아 24시간 지속되는 옅은 이명이 생겼고 만성 비염과 겹쳐 귀는 자주 멍멍한 상태가 되었다. 30년 넘게 큰 병치레 없이 지내던 나에게 원인을 알 수 없이 발생한 이 병은 안 그래도 예민한 나를 불안증으로 밀어 넣었다. 병이 재발할까 봐 시끄럽거나 사람 많은 곳을 피하다 보니 사람들 모임이나 술자리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 간 즐기던 축구와 야구도 영 탐탁지 않았다. 가장 좋아했던 여행도 혹시 비행기 타는 게 귀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부담으로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은 지 오래. 그간 하던 대로 생활하지 못하다 보니 기분은 더 안 좋아지고 귀에 조금만 다른 느낌이 들어도 불안해졌다.


 나의 불안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나는 자연스레 혼자 집을 보면서 엄마 아빠의 퇴근시간만을 기다렸다. 저녁 7시를 넘겨서도 엄마가 오시지 않으면 불안했던 나는 항상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퇴근길의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기에 '할머니, 엄마가 안 와요-'하면서 집전화로 울먹거리는 나에게 외할머니는 단 한 번도 귀찮은 기색 없이 '우리 강생이, 엄마 곧 올 게다, 엄마가 30분 안에 안 오면 할미가 택시 타고 갈꾸마' 하고 말해주셨다. 그렇다고 집에 아무도 오지 않는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외할머니와의 통화는 불안해하던 내 마음을 다독거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외할머니의 자리는 점점 연해졌고, 나는 외할머니한테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흔한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그러다 내가 대학생 때 외할머니가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고 3 때 우리 집에 잠시 머물던 외할머니가 빨래를 걷어 양말을 개시면서 눈이 어두워 짝을 잘못 맞춰놓았을 때, 싫은 티를 내가면서 입을 삐죽이던 못난 손녀는 외할머니가 이렇게 한 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걸 몰랐던 철부지였다. 내 불안을 쓰다듬어 주던 손길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나는 불안해서도 안되고 스스로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온 건지도 모른다.

 

 그러려니 하고 성격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늘 건강했던 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귀에서 탈이 날 줄이야. 그리고 거기에 계속 집착하게 될 줄이야. 왜 몸이 이전처럼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걸까, 영원히 이 불편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나를 옭아맸고, 결국 나는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고 손발이 떨려 회사에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가게 됐다. 피검사, 소변검사 등을 해도 몸에 이상은 없었다. 응급실 의사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불안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고, 병원에서 상담해본 결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약물 처방을 받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눈을 감고 생각해봤을 때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양말 짝을 잘못 찾아놓은 외할머니에게 부루퉁하게 말하던 고등학교 시절 내 모습이었다. 분명 나는 아직도 많이 후회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에. '할머니, 내가 그때 미안했어’하고 말하고 싶어도 이제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없는 것에. 마음에 맺혀 아직 풀리지 않은 미안함이 왜 이제 떠오른 걸까.


 후회와 함께 밀려오는 것은 집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서울의 좁은 월세방이 아닌, 부모님이 계신 본가. 잔디 마당이 있고, 강아지 뿌꾸가 있고 같이 저녁을 먹을 식구들이 있는 집. 주말이나 휴가에 불쑥 내려가서 머물렀던 시골집.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 마을. 그 따뜻함이 너무 그리웠다. 말라버린 몸과 마음을 다시 살찌우려면 우리 가족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짧은 휴가 대신 휴직을 신청하고 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마다 우리 딸 살 좀 찌우자며 먹을걸 잔뜩 차려놓고 기다리셨던 부모님으로부터 '손님처럼 대접받았던 나' 말고 '같이 사는 식구로서의 나'. 동경해왔던 이탈리아 농가 민박의 이국적인 따스함은 아니지만, 푸릇한 풀냄새 풍기는 잔디가 있고 천방지축 날뛰는 강아지 뿌꾸의 활력이 느껴지는 곳. 서울살이를 하며 멀어진 거리를 다시 좁히고 가족으로 살기 위해 나를 따스히 받아주는 시골집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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