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건 변기 위의 시간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이유는 바로 변기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엄마껌딱지 갓난쟁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잠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가 우는 탓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를 건사하느라 과연 나는 누군지 여기는 어딘지 허공에 대고 물어본 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혼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있거나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방 안쪽 바닥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시간의 휴식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초라하더라도 그 좁은 공간과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족하였다. 워킹맘은 가정과 회사일의 균형이 중요하다는데 나는 가정 이전에 개인이 있다는 사실을 꼭 강조하고 싶다. 그 화장실 문을 닫고 변기에 앉아서 숨을 고르던 시간이 아이를 키워내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시간이고 사회로 나가 욕을 먹어도 웃어넘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한 여자의 소중하고 사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시간을 일명 '변기 위의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변기는 소중하다. 세상 온갖 더러운 것을 비교할 때 나오는 대상이 바로 변기라고 하지만 한 유명한 예술작품은 변기에다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변기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을 함께한다. 생각하기에 변기가 놓인 화장실은 오아시스와 다름없다.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이유는 바로 변기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에 비해 나올 때가 뻔뻔해진 것은 그 안에서 궁색하고 옹졸하고 불안한 마음을 비웠기 때문에 당당해진 것이다.
결혼한 여자는 가정과 일의 균형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사실 결혼한 여자는 세 가지 시간을 가진다. 사적 개인, 가정 구성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간들이다. 하나는 인간 장효진이라는 인간의 시간, 또 하나는 내 남편의 아내이자 내 아이의 엄마의 시간, 마지막 하나는 비로소 소장 장효진의 시간이다. 태어나며 자라는 동안 시간의 축에 따라 사적 개인, 가정 구성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이 확장된다.
사적 개인은 태어나서 점차 의존적 개인에서 독립적 어른으로 자라난다. 내가 포함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운다. 물론 모두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도 부대끼고 어려움이 많다. 또 가정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은 처음에는 부모의 자식에서 시작한다. 부모로부터 예절과 상식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교육받고 행복과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자라서 독립된 개인이 되고 결혼하여 부부의 배우자, 자식의 부모로서 그 역할이 바뀐다. 사회 구성원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지나 마침내 경제적 활동을 중심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할 키워 나가게 된다.
결혼한 여자는, 특히 아이를 기르는 여자는 이 세 가지 시간을 오가는 것이 쉽지 않다. 사적 개인의 시간이 가정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에 양해를 구해야 하고 가정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이 끼어들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에서 기를 펴지 못하기 일쑤다.
다음은 나의 평범한 하루 일과다.
6시 45분쯤 일어나서 거실 커튼을 걷고 작은 화분에 햇빛이 비추는 것을 잠시 보다가 미온수를 마신다. 남편의 간단한 아침을 챙긴다. 남편은 씻고 아침을 먹기 위해 주방 식탁에 앉고 나는 거실에서 스테퍼를 한다. 나는 11시쯤 아침을 겸해서 점심을 먹는다. 남편과 오늘 있을 약속이나 아이의 이야기를 하거나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준비와 먹고 치우기 30 분.
남편의 이른 출근에 아이는 아빠가 현관문을 나설 때쯤에는 일어나 배웅을 한다. 아이는 아빠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춘다. 나도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남편은 그때서야 현관을 나선다. 문이 닫히고 아이는 피곤하면 다시 30분 정도 더 잘 수도 있고 스마트학습지를 하거나 가끔 책을 읽기도 한다.
아이도 아침을 먹이고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환기를 한다. 등교 시간이 되면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로 함께 집을 나선다. '선생님 말씀하실 때는 행동을 멈추고 눈을 마주쳐라.' , '아이들과 놀 때 서운한 것이 있다고 해도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점심을 먹을 때는 꼭꼭 씹어서 공주님처럼 우아하게 먹어라.'하고 이내 당부의 말이 되고는 하지만 좀 참아보려고 한다.
요즘은 평일 2-3번은 아이 학교를 거쳐 도서관에 온다. 최근에는 말하기 관련 책을 읽는다. 말하는 내용과 말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상황에 맞는 발성과 톤에 관한 내용의 책이다. 말하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강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조만간 유튜브 채널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보의 신>, <콘텐츠의 신>과 같은 책도 읽었다.
겸임교수로 수업을 하게 된 학교에서 이러닝 수업 운영에 관한 확인 메일이 왔다. 이번 학기 학사 일정과 시험 관련 내용이다. 종종 시험 관련 문의나 요청 사항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하고 그것과 관련한 문서를 꾸려야 한다. 학회 토론을 맡아 이번주까지 전달해야 하는 토론문을 작성한다. 아이 태권도 학원에서 주말 효도캠프 신청 접수를 선착순으로 받는다는 공지에 재빨리 댓글을 단다. 이어서 블로깅을 하거나 브런치 글을 쓴다. 점심은 덮밥류나 샌드위치를 주로 먹는다.
아이가 학교에 돌아올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의 오늘의 학습지를 공부하는 것을 봐주고 태권도학원에 보낸다. 간단히 집안일을 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이어서 로봇 청소기를 돌리면서 눈에 보이는 먼지는 진공청소기로 간단히 청소한다. 저녁 메뉴는 식단표에 정해둔 것을 바탕으로 미리 해동이 필요한 재료를 냉동실에서 꺼내둔다.
남편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을 차리고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는다. 남편은 아이와 줄넘기를 하러 나가고 나는 먹은 것 뒷정리를 한다. 남편이 설거지를 주로 했는데 아이와 저녁 30분씩 VR, 축구, 줄넘기, 자전거 타기 등을 하고 놀면서 뒷정리는 내가 하고 있다. 설거지 거리가 많다 싶으면 식기 세척기에 넣고 주방을 뒷정리 정도만 한다.
이후부터는 각자 플레이다. 나는 1시간 정도 산책을 나가거나 책을 읽거나 TV를 본다. 아이가 자기 책을 가지고 와서 함께 읽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이다. 기왕이면 독서노트를 쓰면 좋겠지만 한 두 번은 그대로 내버려 두자 싶어서 참는다. 남편도 자기 시간을 갖는다. 아이를 씻기고 머리를 말리고 책상이나 거실 어지럽힌 것들을 정리한다. 오늘 일을 복기하고 내일 할 일을 적어둔다. 스테퍼를 4000개 정도 한다. 씻고 11시 30분 정도에 잠을 잔다.
결혼한 여자의 시간은 쪼개는 것이 아니라 포개는 것이다.
다음은 나의 하루를 세 가지 시간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정리해 보면, 휴식시간인 취침과 미디어 시간인 8시간 12분을 제외하고 세 가지 시간은 각각 사적 개인으로의 시간(변기 위의 시간)(7시간 5분), 가정 구성원으로의 시간(5시간 18분), 사회 구성원으로의 시간(7시간 20분)이다. 총합은 하루 24시간을 넘는다.
세 가지 시간은 독립적이지만은 않다. 서로 영향을 줄 수 있고 동시에 영향을 주는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간헐적 단식을 위한 식단은 가족 식사 시간과 준비에 영향을 준다. 개인적 관심사로 책을 읽거나 정보를 찾아보고 워크숍이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가정의 일이기도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다.
사적 개인의 시간은 나의 루틴을 통해 무리 없이 매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라도 꾸준히 하게 되면 그것을 통해 다른 긍정적인 습관이 연계되어 좋은 효과를 주기도 한다. 사적 개인의 시간은 나의 자존감을 만들고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면 곤란하다.
아내와 엄마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가족 구성원과 함께 있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에서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 함께 있는 시간에는 사적 개인으로의 시간과 사회 구성원으로의 시간을 할애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남편과 가정 일 분담, 아이의 육아와 가사, 온 가족이 함께 친밀한 시간을 갖는 것 등을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당연히 일의 위계는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은 위의 두 가지 시간과 연계된다. 반대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간이 다른 두 가지 시간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결혼한 여자의 시간이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다. 새롭게 가정을 만들었거나 새로운 구성원이 생겼거나(출산, 육아의 새로운 구면(입학이라던지)), 취업과 퇴사 등의 사회적 활동 변화와 준비에 따라 세 가지 시간의 구성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막연히 좋다고 하는 것들을 위한 루틴, 습관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세 가지 시간에서 그 시간을 채우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순차적으로 혹은 병행하여 나의 시간을 24시간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30시간처럼 포개어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가 비로소 행복지도를 생각한 시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