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나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 1
아이가 갓난아이면 엄마들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 책 한 권 읽거나 영화 한 편 보는 일이 마치 오래전 일처럼 아득할 지경이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엄마는 밀린 집안일을 음소거 모드로 해치운다. 핸드폰 쇼츠를 뚫어지게 한참을 보거나 보상심리의 야식 파티를 하고는 쌓아둔 피로를 풀기 위해 서둘러 잠이드는 일이 대부분이다. 아기 개월수가 찰수록 시간이 조금 생기지만 매슬로우의 욕망계단을 오르기는 쉽지않다.
아이를 재우면서도 이른바 등센서가 있는 경우, 엄마는 부동의 자세로 아이에게서 반경 20cm 범위 내에 머물러야 한다. 아이를 재워야 하기 때문에 조명 밝기는 최대한 낮춘다. 종이책을 읽기는 밝기나 양손의 자유도에 한계가 있어서 힘들다. 결국은 핸드폰을 쥐고 이 '행복한 감옥생활'의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접하는 수 밖에.
이렇게 엄마들의 문화생활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미혼시절 누렸던 문화생활의 반의 반의 반도 누리기가 힘들다. 부모님 찬스나 남편과 아내가 번갈아가며 자유시간을 가지는 경우 외에는 힘들다. 진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몇시간에 걸쳐 읽어내고 그 여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인가. 놀이하는 인간이다. 사유하는 인간이고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게 의사소통이 어려운 어린 것을 키워내는 책임에 눌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딘지도 모를 생활을 하는 것이 까마득할 때 우울감이나 자존감이 바닥치는 소리를 듣곤 한다.
눈 앞에 이 아이는 내가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꿈을 향해 노력해왔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하루가 다르게 제 살을 키워나가며 이도 하나 나지 않은 입을 반달로 열어 방긋 웃어주는 것이 제 할 일의 전부다.
이럴 때, 그러니까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질끈 동여매고 아이 젖을 물리고 이유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허겁지겁 엄마 밥 따로 챙겨 먹기 귀찮은 시간이 엉겁처럼 느껴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부부간의 동지애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위한 문화적 토양이다. 이것은 마치 깊은 숨 들이쉴 수 있는 울창한 숲을 향해 내놓은 창문과 같은 것이다.
다 읽지는 않았어도 아이를 재우고 읽던 책이 식탁 위에 엎어져 있을 때, 벌써 열번은 보았던 영화를 넷플릭스로 다시 보기할 계획이 있을 때 엄마는 아이에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부어도 다시금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읽었던 책은 시나 소설은 아니었다. 대학원 전공하면서 읽었던 테리이글턴의 <문화이론>, 이푸-투안의 <공간과 장소>, 레프마노비치의 <뉴미디어의 언어>같은 것이었다. 반면 영화는 콘텐츠 분석하며 보았던 지브리 애니메이션, <트루먼 쇼>, <아멜리에>같은 조금은 작위적인 것들을 보았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에 비해 창의적 자유도가 커서 행복했고 뒤의 두 영화는 제4의 벽을 깨는 시도를 통해 영화 바깥의 나를 인지하게 하였다.
가끔은 이런 책들과 영화 속의 어느 한 시점에서 튀어나온 문장, 대사 한마디가 나의 지금 삶을 딱떨어지게 정의하기도 한다. 내가 갈등을 겪고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불안해 하고 있을 때에도 이런 문화콘텐츠의 한 장면은 나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내 속에 뒤섞여 있던 문장들이 책이나 영화 속에서 다른 목소리로 튀어나온 것일테다.
어쩌면 일상을 벗어난 다른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것에서 지금과 다른 나의 모습을 탐색하고 그 속에서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그 가치관과 환경에 나를 대입해보기도 하고 가슴무너지고 뼈아픈 반성을 대리경험하면서 잠시 유예된 나의 총천연색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몇가지를 큐레이션하고 그를 통해 지금의 나에게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는 추진체가 바로 문화다. 우울이나 피곤을 모른채 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평온한 집안을 만드는 문화는 미래를 꿈꾸고 지금을 인정할 수 있는 자존감 있는 엄마와 아빠에 의해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경작하다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상반되는 의미다. 그것에는 어떠한 필연이 없다. 단지 사회적으로 이렇게 하자고 합의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분명 인간의 감각기관에 특화되어 아름답게 보일만한 규칙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버리는 방식도 역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문화로 이어나가고 있다.
엄마는 어린 아이를 돌보는 특별한 시간에서조차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문화를 놓지 않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