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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May 26. 2023

내돈내산

‘남돈내산’이 더 좋은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오늘, 늘 그러했듯, 나는 지원팀에 '기안 작성 요청' 메일을 보낸다. 기안(起案: 사업이나 활동 계획의 초안을 만듦. 또는 그 초안)이란 어떤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회의할지 미리 보고하는 일이고, 기안 작성 요청이란 담당자에게 이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다. 회의에서 누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 나눌지 보고할 뿐 아니라, 얼마나 돈을 쓸지도 보고한다. '업무추진비', '회의비' 등 그 돈에 붙는 이름은 회사마다 다르다고 한다. 회의에 커피, 쿠키 등이 함께하면 1인당 최대 만 원, 식사가 함께하면 최대 3만 원을 보고한다.


누군가는 안건을 조사하여 정리해 오기만 한다. 누군가는 그 회의를 주재하기만 한다. 맡은 바가 그러하다. 나는 회의에 누가 오는지 미리 파악하고, 회의를 기안하거나 그 작성을 요청하고, 식당을 정하며, 메뉴를 정하는 일을 주로 한다. 논의할 내용을 미리 조사하여 발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 메뉴를 정하는 일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회의 중 돈을 썼다면 회의록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보통 '영수증 처리'라 불린다. 어떤 회사에서는 이러한 일이 특정 직원에게만 주어진다. 학력, 성별, 입직 경로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다.


밖에서 먹는 밥은 세 가지 맛을 지닌다. 값에 미치지 않는 맛, 값에 버금가는 맛, 그리고 값에 비해 훌륭한 맛이 그것이다. 그중 값에 미치지 않는 맛을 보이는 식당은 결국 문을 닫고야 만다. 그렇게들 알고 있을 것이다. 왠지는 모르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 주변에는 그러한 식당들이 꽤나 오래 버티고 있다. 직원이 친절하다든가, '분위기 맛집'이라든가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건 또 아니다.


그러한 식당이라 하더라도 장사가 시원찮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찾는다. 점심시간이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로 정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열두 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식당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예약하지 않아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종업원은 기다리란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하는 투로. 휘리릭.


사라지는 종업원 너머로 빽빽이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인다. 냠냠 쩝쩝 그리고 단란하게 먹는다. 그렇다. 회사 근처의 밥은 사실 꽤나 먹어 줄 만하다. 역하지만 않으면 다 잘 먹는 내게 뭔들 안 맛있겠냐마는, 다른 사람들도 잘 먹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값에 미치지 않는 음식이란 '맛에 비해 비싼' 음식이지 않을까? 달리 말해 그건 '그냥 비싼' 음식이지 않을까? 신기하게도,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는 비싼 밥이 많다. 그게 뭐 그리 특별한 일이냐 할 수도 있겠다. 회사 근처라는 사실만으로도 손님의 주머니가 두둑하다는 점, 임대료가 비싸다는 점 등을 생각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울 아닌 곳에서 하는 칼국수 한 그릇의 가격이 강남역이나 광화문역 주변에서 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 회사 근처에는 'OO세트'를 파는 음식점이 많다. 프렌차이즈도 아니고, 버거킹이나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도 아닌데 말이다. 세트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이만 원 중후반대 가격으로 메뉴판에 올라 있다. 세트 메뉴를 팔지 않는 식당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산수만으로 손님이 지불 금액을 삼만 원 밑으로 맞출 수 있게끔 단품 메뉴들을 구성한다.


물론, 재치가 그리 남다르지 않은 식당도 많다. 그런 데서도 손님은 주문 금액을 맞추게 된다. 굳이 삼만 원까지 꽉꽉 채우고 있다. 가벼이 배만 채우고 나오면 될 일이라 생각해서, 내 몫으로는 가츠동 하나만 달랑 주문한다. 팀장은, "OO씨 고생하는데 맛있는 거 드셔야죠"라 하며 새우튀김이랑 연어샐러드랑 닭 껍질 튀김만두도 주문하라 한다. 마실 것도 고르라 한다. 다른 동료들처럼 나도 에이드를 고른다. 이건 데이트 메뉴가 아닐까 싶은데,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랑 그걸 함께 맛보고 앉았다. 팀장은 계산하려 카드를 꺼내 든다. 카드에는 회사 로고가 보인다. 팀장 이하 직원들은 말한다. "잘 먹었습니다, 팀장님!" 개중에 나와 입직 경로가 같은 직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더 크게 들린다.


회사 사람이라면 모두 알 정도로 가까이 있는 문구점에는 게이밍 키보드와 게이밍 헤드셋이 진열되어 있다. 고작 천 원짜리 편지지를 사려 해도 점원은 "어떤 카드로 계산하세요?"라 묻는다. 왜일까? 아무리 과자로 군것질하길 좋아한다 하더라도 다 큰 어른들이, 하필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런 어른들이 과자 이것저것을 상자에 가득 담아 계산대에 선다. 다과회를 방불케 하는 어떤 직원의 방에 가 본 후로는, 그 과자 꾸러미가 다 어디로 가게 되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예산을 아껴 써서 남기면 상을 줘야 할 텐데, 오히려 벌을 준다고도 한다.


팀장은 세 명이서 하는 회식 자리에서 전복수육을 추가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구만 원이 넘게 된다고 나는 미리 주의를 준다. "그럼 내가 내지, 뭐!"라 하며 이를 강행한 팀장은, 구만삼천 원 중 삼천 원은 본인 카드로, 나머지 구만 원은 회사 카드로 계산한다. 삼천 원짜리 영수증은 휴지통에, 구만 원짜리 영수증은 내 수첩으로 들어간다. 한편, 이 바닥에서는 구만 원짜리 영수증을 팀장이 직접 처리하는 것이 일종의 미덕으로 통하는 듯하다. 


정신없이 먹느라 제한된 금액을 넘겼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오면 해결될 일이니 말이다. 이런 일에도 '명의 대여'가 있을 줄이야. 보증을 서거나 회사 지분을 나누는 일에만 그런 말이 있는 줄 알았다. 회의에, 아니 그 식사 자리에 없던 사람의 이름을 넣어 다시 기안(奇案: 기묘한 생각이나 계획) 작성을 요청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인근 회사 팀장의 이름과 소속을 외워두면, 이럴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먹는 사람 따로 이름 빌려 오는 사람 따로'인 경우도 있다. 팀장이 오늘 점심엔 한우를 굽겠다고 작심할라치면, 나와 입직 경로가 같은 누군가는 미리 서너 이름을 빌려 기안하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누군가는, '내돈내산'으로, 그러니까 내 돈으로 내가 사 먹을 정도로 맛있으니 그렇게 삼만 원을 꽉꽉 채워 주문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왜 밤에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 많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19시 이후에는 회의비를 안 쓰는 게 좋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지원팀에서 문제 삼는다나 뭐라나. 누가 설명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는 회사 카드를 손에 쥐고 회의라는 이름으로 동네방네 맛집 탐방을 이어간다. "오늘 점심엔 어떤 맛난 걸 먹을까요, 여러분?" "고기 먹어요, 팀장님!"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고 한다. 마지막 회식, 아니 마지막 회의의 결코 작지 않은 주제는 탈모였다. 탈모를 방지하기 위해 저마다 어떤 샴푸를 쓰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샴푸로는 부족하니 탈모치료 의료기기를 써야 한다는 이도 있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꽤나 진중했다.


기안 작성을 요청한 후 사직서, 보안 서약서, 물품 반납 확인서 등 이런저런 서류를 작성했다. 환송회라는 민망하고 쑥스러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 열한 시 삼십 분에 즈음하여 나는 회사를 나섰다. 이미 많은 사람이 회사 앞 광장에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있다. 슬리퍼 바람으로 건물을 빠져 나오는 사람도 더러 보인다. 회의 중에 배달부 전화를 받고 나온 듯하다. 열댓 개쯤 되어 보이는 도시락을 양손에 쥐고, 영수증은 손가락 사이에 꽂은 채 다시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햇살은 따사롭고, 햇살만큼 따사로운 웃음꽃이 이들의 얼굴에 활짝 피어 있다. 맛있는 도시락을 먹을 생각에서인지, 회의록이라는 하나의 작품을 그려낼 생각에서인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제2회 전주동네책방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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