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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어느 날 아빠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아빠들은 주변에도, 드라마에도, 영화에도 흔했지만 아빠는 조금 달랐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병원에 가야 하는 병이 있었다. 그건 감기 같은 것이 아니어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일주일 푹 쉬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한 달에서 길게는 반년 정도 병원에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나서면 계속, 계속 술이 마시고 싶은 병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아빠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엄마는 이 병이 당뇨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수술을 해서 완치가 되는 그런 병이 아니라고. 평생 술과 싸워야 하는 병이라고. 아빠는 아주 오랫동안 술과 싸웠다. 아빠가 젊었을 때부터, 그러니까 내가 늦둥이로 태어나던 그 순간에도 아빠는 술에 취해 병원에 있었다. 내가 아빠를 기억하는 첫 순간에도 아빠는 취한 모습이었다. 

     

병원에서 나온 아빠는 남들과 비슷했다. 여느 아빠들보다 좀 더 자상한 편이었다고 하는 게 맞다. 그리고 엄마와 내가 자상한 아빠에 익숙해질 때쯤, 예상할 수 없을 때 꼭 다시 술을 마셨다. 우리가 방심하면 아빠는 술을 마셨다. 바로 병원에 집어넣지 않으면 계속해서 마셨다. 우리 사이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 같은 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빠가 숨겨둔 술병을 찾는 건 보물찾기 게임 같았다. 어느 순간 문 밖 검은 봉지에 숨겨둔 술병에서부터 언뜻 보면 술인지 알 수 없는 페트병까지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찾아서 엄마와 동네를 수색하며 다녔다. 아빠는 놀이터 어귀에 쓰러져 있거나 술집에 핸드폰을 둔 채 사라져 있었다. 술에 취한 아빠는 소리를 지르고, 어떤 때는 집안 곳곳의 물건을 부수고, 넘어지고, 그러다가 꼭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내뱉는 아빠를 설득하기 위해 술 한 병을 더 쥐어주면서 병원에 데려가는 밤의 반복이었다. 어느새 나는 아빠가 단 한 잔만 마시고 와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여느 때와 비슷한 입원 이후에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 평화도 길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고 기대했던 모든 순간의 끝에 아빠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술에 문제가 있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았던 점은 본인이 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계속해서 술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아빠가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해서 내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빠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게 딱히 고마운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늘 나에게 아빠는 아주 힘든 병과 싸우고 있는 거라고 말했지만, 마시면 안 되는데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싶어 지는 미지의 병을 이해할 만한 머리와 마음이 내겐 없었다. 나는 어렸고, 술을 마시고 엉망이 되는 아빠는 무섭고 또 무책임했다. 아빠가 술을 끊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아빠가 술만 마시면 그동안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행동들은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마지막이 된 입원 이후에 불안한 평화가 조금씩 길어졌다. 깨질 것 같던 평화는 아빠가 당연히 술을 마셨던 위기 상황들을 술 없이 지나가며 이어졌다. 아빠는 나름 분투하고 있었다. 2년, 3년, 4년... 넘실 거리던 불안감이 파도를 타면서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아빠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십여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건 내가 특별한 대처를 해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이전과는 다른 더 무서운 경고를 해서도 아니었다. 중독을 끊어 내는 획기적인 약이, 새로운 치료법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아빠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아빠만이 알 수 있는 변화였다.     


그때 나는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감사했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됐고, 이제는 행복해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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