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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술 마시는 아빠가 있던 집의 관성

적어도 내 기억에 아빠는 항상 취해있거나, 불안한 상태였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아빠는 위험한 상태였다. 혼자 술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아빠와 문제없는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런 가족을 몰랐고, 벗어나고 싶어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족은 여전히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아빠의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나는 왜 괜찮지 않을까. 아빠의 회복은 나와 합의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순간에 술을 끊었다. 온몸으로 그냥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빠가 나를 위해 술을 끊은 것은 아니라는 것. 아빠는 정말 자신이 살기 위해 달라졌다는 것. 그 사실은 내게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아빠가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했다.     


아빠가 사과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빠는 수도 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할 만한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빠가 조금만 미안해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내 마음은 밑 빠진 독 같았다. 어떤 때는 사과를 담고, 또 담아도 모자랐다.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 만으로는 부족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아빠에게도 화가 났다.      


그동안 아빠는 내가 돌봐야 하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맘 놓고 탓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괜찮아졌다. 내 허락도 없이. 심지어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아빠가 살고자. 술에서 깬 아빠는 아빠 역할을 하려고 했다.      


“애가 내 눈치를 보잖아.”     


나는 치열하게 아빠를 위해서 기분을 살폈을 뿐인데, 아빠는 그걸 지적했다. 눈치를 보지 않는 방법이 뭔지 몰랐다. 게다가 나는 그동안 눈치를 봤던 게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서 아빠의 기분을 살피고, 기분이 상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던 것뿐이었다. 내 노력을 몰라주는 게 억울하고, 아빠에게 화가 나면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방법을 고민했다. 아빠가 눈치 보는 걸 싫어하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술에서 깬 아빠가 점점 내 역할을 뺏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아빠 역할을 하는 아빠는 몹시 낯설었다. 그동안 아빠는 잔잔한 일상에 꼭 한 번씩 폭탄을 던졌는데 이제는 그런 충격적인 이벤트가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드라마에 더 이상 갈등이 없었다.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허전하고 외로운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엄마는 정말로 괜찮은 것 같았다. 내 세계 속에서 엄마는 희생자 중 한 명이었는데, 현실의 엄마는 너무나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또 한 번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혼란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엄마 역시 어렵게 찾은 평화였을 텐데. 감히 내가 아빠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아서 불편한 기분이 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건 더 이상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빠가 아빠 입으로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건 저절로 나의 비밀도 까발려지는 일이었다. 수년간 유지해 왔던 역할이, 암묵적인 집 안의 규칙들이 모두 깨지고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요동치는 일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항상 마음이 부딪힌다. 어떻게 해도 아빠가 술에 취해 주었던 상처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 그렇게 내 불행의 원인을 오로지 아빠에게 돌리고 싶을 때, 아빠는 이미 진즉 술을 끊었다는 게 떠오른다. 아빠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머리로는 아빠의 병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빠의 병이 아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빠가 아니라면 난 누구를 미워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보다 나에게 큰 잘못을 한 사람도, 아빠보다 더 미운 사람도 없었다.     


그제야 내가 한 번도 아빠를 마음으로 용서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던 세계는 깨졌고, 나는 보통의 아빠를 얻는 대신 마음 놓고 미워해도 되는 사람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너무나 큰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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