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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아빠 딸

괜찮지 않지만 괜찮아야 하는 나도 성인이 되어야 했다. 아빠와의 미해결 된 문제는 그대로였다. 스무 살을 앞두고 있을 때 나를 괴롭히던 고민 중 하나도 역시 술이었다. 대학에 가면 그렇게 술을 마신다는데, 내가 술을 마실 수 있을까? 술은 부모한테 배워야 한다는데, 나는 그럴 수도 없다. 아니, 앞으로 술을 마시지 못한다면 내 사회생활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빠 때문에 술을 마셔 보지도 못하는 건 억울하다. 그렇지만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빠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고민들보다 걱정이 되었던 건 ‘내가 중독자가 되면 어쩌지?’였다. 중독은 100% 유전된다고 말할 수 없으나 분명한 건 이 병은 대물림이 쉽다. 그 말은 내게 알코올 중독이 될 가능성이 남들보다 더 많이 열려있다는 뜻이었다. 아빠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이니까, 나 역시 술 한 잔만 마시면 그 순간 중독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었다. 중독이 된다면 아빠처럼 술을 끊어 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지만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영원히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건 또 싫었다. 술 한 잔 마시고 죽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술 한 잔에 엉망이 되는 아빠는 숱하게 보았지만.     


내 고민은 이모와 이모부들이 해결해 주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이모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조카의 첫 음주를 위해 가족들이 모두 모이다니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웃긴 그림이었다. 술을 마시고 나서 이모네에 가서 잔다는 계획까지 철저하게 세웠다. 두려움과 동시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떨렸다. 초록병에 들은 무색의 그 음료가 독약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웠다. 술에 대한 두려움 반, 이걸 마시지 않는다면 왠지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반. 나는 그때에도 더 괜찮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선택을 했다.      


처음 마셔 본 빨간 뚜껑의 소주 첫 잔은 그동안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꿀꺽 넘어갔다. 아빠는 대체 이게 뭐라고. 시시한 생각이 스쳤다. 오묘한 맛이었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그동안 숱하게 상상했던 그림, 소주 한 잔에 중독이 되거나 쓰러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온몸이 짜릿짜릿한 특별한 느낌도 없었다. 난 너무 멀쩡했다.     


그 날 8잔을 마셨다. 한 병 남짓 마신 내 얼굴이 달라지거나, 혀가 꼬이거나 걸음을 비틀비틀 걷는 일도 없었다. 이모들은 역시 네 아빠 딸이긴 한가보다, 하며 웃었다. 내게 아빠 같이 흐트러진 모습은 없었다. 나는 그간의 고민이 무색해 웃었다.      


그땐 아빠도 아무렇지 않게 잘 마시던 시절이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아빠가 한 잔만 마셔도 멈출 수 없게 될 때까지 얼마나 괜찮았던 시간이 있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빠와 다른 사람이고, 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는 내게 남들보다 많은 알코올 분해효소는 물려주었지만, 중독은 물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역시 아빠 딸이라고 했다. 아빠 피를 물려받았으면 못 마실 리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맥주는 맛있어서 마시는 거고, 체육대회나 등산 후엔 막걸리가 제격이고, 소주는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맞추려면 못 마실 이유가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집단에서 소외되는 시대가 이미 지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을 좋아하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고 싶었다. 물론 몸도 따라주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은 아빠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아빠의 술 문제로 술을 소스라치게 싫어하는 강박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술에 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그 생각은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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