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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보이지 않는 재갈

아빠가 술에 취해있을 때보다 지금 더 화가 나는 이유가 뭘까. 그때의 나는 감정 불구였고, 지금의 나는 화가 나는 감정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뭔가 나아졌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화가 나는 게 더 긍정적인 걸까. 어쩌면 한 번도 아빠에게 진심을 다해서 화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간의 마음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와서 폭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예전 일을 떠올려 보면 아빠가 술에 취했던 상황들이 덤덤하게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아빠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난 아빠가 그럴 줄 알았고, 나는 의연했고, 괜찮았던 것 같은 기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 느낌. 모두 그때의 두려움을 덮으려고 만들어낸 ‘내’가 느낀 무덤덤함일 것이다. 술에 취해서 소파에 앉아 우는 아빠를 보며 괜찮을 여덟 살은 없을 테니까.   

  

내가 당시의 아빠에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한 이유는 다양하다. 내가 화를 냈을 때 아빠의 반응이 무서워서. 내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엄마를 더 힘들게 할까 봐.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 당시에는 내 감정을 정확히 모르겠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화가 나는 건가? 내가 지금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가? 이런 걸 고민하다 보면 이미 상황은 지나가 있었다. 물론 대체로 아빠가 취해있어서 말하는 게 의미 없는 순간들도 있었다. 말해도 기억하지 못할 게 뻔한 그런 상태. 그래서 결국 나는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빠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취한 아빠는 기억하지 못하고, 술에서 깬 아빠는 자극해선 안 되니까.     


“엄마 이혼할까?”     


아빠가 툭하면 재발하던 그 긴 시간 동안 엄마는 내게 딱 한 번 물었다. 엄마는 울지 않았다.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 맘대로 해. 진심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아빠가 너무너무 미웠지만, 진심으로 아빠가 사라지길 바란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정말 아빠를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엄마가 원한다면 아빠랑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 중 날 책임질 수 있는 보호자는 엄마니까. 그래서 두려운 마음도 삼켰다. 엄마에게도 내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아빠가 뭘 알아. 아빤 나 태어날 때 없었잖아.”     


“그때 놀이터에서 늑대 소리 내던 거 듣고 아빠 잡아올 때, 그때 진짜 싫었는데. 취하면 왜 꼭 늑대 소리를 냈어? 전생에 늑대였나 봐.”     


“아빠 그걸 왜 몰라? 없었나? 아, 그때 아빠 병원에 있었지.”     


지금까지도 내가 아빠를 툭툭 건드는 레퍼토리다. 지금도 종종 입에서 툭툭 나오는 미운 말들. 나는 아직도 아빠한테 진심을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기분이 나쁠 때, 뭔가 화가 났을 때 내가 아빠를 공격하는 방법은 케케묵은 옛날 일을 끄집어내는 거다. 내 안에 있는 나는 아직도 여덟 살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용해서 성숙하단 소리를 듣던 여덟 살 때보다 지금 더 유치하고,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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