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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우리가 화해할 수 있을까

내 시간은 아빠가 술을 마시던 시절에 멈춰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내 안에서는 십여 년 전 울고 있는 내가 아직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      


괜찮은 척하며 꾸역꾸역 앞으로 떠밀려 나가던 어느 겨울에 암 선고를 받았다. 위암이었다. 수술만으로는 부족해서 30회가 넘는 항암을 해야 했고, 항암은 아직 진행 중이다. 몸이 아픈 덕분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었다. 뭔가에 떠밀려 달려가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빠도 대학원 때는 이렇게 보냈잖아. 술 안 마시고 글을 어떻게 써? 대학원은 술 마시려고 가는 거야.”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아빠에게 항의라도 하듯 술을 마셔대던 나는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괜찮은 척하던 나는 정말 몸이 아프고 나서야 드디어 나 좀 아프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아픈 핑계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게 썩 나쁘지 않았다. 이런 병으로 아파서 미안한 마음 너머로 오랜만에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이만하면 최고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암이 생겼다는 소리에 아빠는 무너졌다. 내 암이 마치 본인의 잘못으로 생긴 것처럼 힘들어했다. 내게 생긴 병이 아빠 때문일 리가 없는데도. 그 모습을 보며 이만한 복수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으니 나는 얼마나 아빠를 미워하고 있던 걸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제 아빠를 충분히 미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모든 문제가 ‘아빠 때문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나 자신이다. 그동안 ‘아빠 때문’이라는 말은 마법 같은 주문이자 도피처였다. 내 문제를 직면하는 것보다 무조건 아빠를 미워하는 게 더 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아빠에 대한 미운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아빠가 미운 순간이 더 많고, 아빠와의 대화는 피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다. 아빠가 사라져야 난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진심으로 아빠를 잃고 싶었던 적도 없다. 아빠에 있어서는 늘 양가감정이 저울질한다. 어느 쪽이 진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모든 아빠들이 다 이렇게 딸들을 무서워하면서 사는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네 눈치가 보이냐.”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아빠는 진심이었다.      


“눈치를 봐야지. 아빤 나한테 잘못한 게 많잖아.”     


꼭 말이 예쁘게 안 나간다. 내가 아빠의 눈치를 보며 보냈던 시간을 이렇게 보상받기라도 해야 덜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로 화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화해하기 시작한 걸까. 어쩌면 완벽한 화해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에서부터 아빠를 용서할 때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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