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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고작 술을 마시기 위해 필요한 자유

아빠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내게 한 당부가 몇 가지 있다.      


1) 감정 조절을 위해 술을 마시지 말 것. 특히 우울한 기분이 들 때 그 기분을 바꾸려고 술을 사용하지 말 것.

2) 블랙아웃은 안 됨. 절대로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시지 말 것.

3) 주량이란 건 없음.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니 주량을 확신하거나 자랑하지 말 것.

4) 소주보다 맥주가 괜찮다거나, 곡주라고 막걸리가 더 괜찮고 그런 것은 없음. 한 잔 마셨다면 다 똑같음. (임상실험은 아빠가 직접 본인 몸에 해봤음.)

5) 해장이 필요하다면 과음임. 어쨌든 해장술은 절대 금지.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중독 관련 서적에서 말하는 ‘분리’가 이런 물리적인 분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런 물리적인 분리가 꼭 해답인 것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니 집 안의 문제가 머릿속에서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일단 아빠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 아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아마 집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면 열 번 마셨을 것도 한 번으로 끝났을 거였다. 그 정도로 아빠가 신경 쓰였다. 아빠가 없는 곳에서 난 자유로웠다. 그래도 열 번을 마시면 늘 아빠의 당부를 잊지 않으며 마셨다. 내 나름대로는 아빠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려고 자꾸만 집 밖으로 나갔다. 어떤 연예인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자유롭고 편하게 술을 마시려고 차를 없앴다고 하는 이야기를 보며 웃었다. 맞는 말 같았다. 차가 있지만 운전은 무섭다는 핑계와 아침, 밤으로 운전하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쁘다며 학교 가까이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일상이 재미없고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에겐 건강한 일탈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건 결국 편의점에서 사는 4캔에 만 원짜리 손쉬운 일탈이었다. 대학원 생활에는 공짜 술도 많았다. 오늘은 어떤 교수님이, 내일은 어떤 선생님이 함께하는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왠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억울했다.    

  

엄마는 아빠의 대학원 시절을 제일 끔찍하게 생각했다. 술을 마실 숱한 핑계들이 생겨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경험한 대학원은 술을 마시지 않는 분들은 어느 자리에서든 술을 마시지 않고도 정상적인 대학원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술이 없으면 대학원 생활을 어떻게 버텨 나가냐는 쪽이었다.      


물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술이 마시고 싶어 죽겠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의 당부는 깨지고 있었다. 블랙아웃이 될 때까지 마시고, 오늘은 날을 잡고 취하려고 마시고, 어색한 관계를 풀려고 마시고.     


간헐적 폭음. 내 상태였다. 자주 마시지 않아도 어쩌다 갖는 술자리는 폭음으로 이어졌다. 술자리에서는 왠지 멈출 수가 없었다. 술을 먹지 않아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내가 싫어하던 아빠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고 싶었던 마음은 이미 예전의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역설적이게도 아빠의 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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