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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마른 주정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은 뒤 생긴 감정적인 문제는 아빠에 대한 나의 미움과 원망,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의 마른 주정이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른 주정은 금단 증상의 일종이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술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비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상태다. 한 마디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더 미쳐버리겠는 상태.     


이 시기의 아빠는 술을 마실 때보다 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술을 마실 때의 아빠보다 더 무서웠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화를 내는 아빠는 이중인격 같았다. 내심 아빠가 분노조절장애가 아닐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세상의 숨 쉬는 모든 것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건 마른 주정이었다. 술을 못 마셔서 손을 덜덜 떠는 것만 금단이 아니었다. 아빠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인 것을 인정할 때처럼 순순히 마른 주정 상태임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아빠의 마른 주정에 어떤 때는 차라리 아빠가 술을 마셔버렸으면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병원에 보내기라도 할 텐데. 그렇게 조금 안 보고 살면 다시 미안한 마음에 나에게 자상해진, 용돈 주는 아빠가 돌아올 텐데.      


“나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 확 나가버릴라니까. 니들끼리 잘 살아.”     


아빠는 기분이 나쁘면 꼭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가출하겠다고 협박하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나이 50 먹은 어른이 하는 말로는 그 말이 정말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집을 나가겠단 액션을 하는 아빠를 붙들었다. 아빠가 이렇게 나가면 다시 술을 마실 거고, 그러면 어렵게 5까지 왔는데 다시 0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지금 관심이, 사랑이, 배려가 필요하다. 내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왜 아빠는 어른 나이가 되도록 저렇게 사랑이 고플까. 이제 나한테 사랑을 좀 나눠줘도 될 텐데. 아빠는 정말 끝도 없이 이기적이다.     


술이라는 형체조차 없이 아빠의 병과 싸우는 것은 더 지치는 일이었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이건 정말 평생의 병이었다. 마른 주정이 오래가는 동안 나는 그냥 그 모습이 아빠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술을 마신 아빠와 병원에 가 있던 아빠만 보느라 내가 아빠의 본모습을 몰랐던 거라고. 애초에 아빠는 기대할 만한 어른이 아니었다고.      


‘마른 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누가 지었는지 정말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상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었지만 동시에 더 희망이 없어지기도 했다. 아빠 같은 사람의 ‘회복’은 단순히 아빠가 술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마시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아빠의 회복은 이제 정말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것을 뜻했다.      


그건 그냥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아빠의 삶을 바꿔주는 마법도 없었다. 약도, 명료한 치료법도 없는 병. 그렇다고 애처롭거나 불쌍하지도 않은. 정말이지 공감할 수 없는 병.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인 아빠가 있다는 것은 아빠를 더 열렬히 걱정하면서 동시에 아빠가 더 미워지는 마음을 달래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내 세계가 넓어질수록 아빠의 병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 주변에는 아빠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건 내가 가진 행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아빠가 미운 것과는 별개로 세상에는 아빠가 가진 병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사람들에게 아빠가 가진 병은 구제 불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아빠에게 꼭 희망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생각하기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나에게 이런 고민과 짐을 지게 하는 아빠가 미웠다. 이제 나는 온전히 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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