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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씨씨 Nov 17. 2019

행복의 필요충분조건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문득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다.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은 지는 십 년도 더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불안했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일을 늘려 스스로를 몰아세워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은 마음만 크고 달려가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했다. 한없이 가라앉고 아무 의욕이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온전히 쉴 수도 없었다. 불안함 때문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관성에 붙들린 사람처럼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을 즈음부터 줄곧 장래희망 란에 써넣곤 하던 일을 하고 있던 때였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겠다고 선택했던 공부는 끝이 없었다. 학부를 마치고, 관련 자격증을 따고, 현장과 멀어지지 않으면서 대학원 진학. 남들처럼 화려한 스펙은 아니어도 어릴 때 세웠던 계획에 의하면 나는 아주 착실하게 그 길을 가고 있는 셈이었다. 집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내게 사람들은 부족한 게 없다고 했다. 친구들은 내가 하고 싶다고 했던 공부를 쭉 해 나가는 게 부럽다고 하던 때였다. 모든 것이 좋아야 할 시점에 나는 가장 불행했다.     


이 공부를 해 나가는 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공부가 아닌 것 같았다. 한 번도 이 일에, 이 공부에 진심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중독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누구였을까. 왜 나는 이제 와서 방황하는 걸까.     


이런 고민 끝에 늘 아빠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답답하고 화가 날 때, 회피하고 싶은 문제가 생길 때 아빠가 떠올랐다. 스스로가 싫어질 때, 한계에 부딪히는 것 같을 때 아빠를 떠올랐다. 아빠가 나에게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꼭 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로부터 무언의 강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 순간, 이 모든 게 다 아빠 때문인 것 같았다.      


아빠에게는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라는 수식어가 있었다. 아빠를 정의하는 가장 명료한 말일 것이다. 아빠가 숱한 ‘재발’을 할 때에도 아빠는 회복 중인 알코올 중독자였다. 재발은 회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고 한 해, 그다음 한 해를 버텨 나가자 아빠는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빠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아빠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중독을 공부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빠는 그게 본인이 계속해서 술을 마시지 않게 하는 울타리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 역시 썩 괜찮았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문제는 아빠의 술이었다. 당연히 아빠가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빠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내 숙명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회복자인 것이 내 스펙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우리 집이 술에 문제가 있는 아빠가, 혹은 엄마가 있는 집의 좋은 회복 샘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는 한 대체로 화목했고, 대화했고, 함께 여행도 갔다. 나는 아빠와 ‘친한’ 딸 쪽이었다. 우리에게 빠지는 건 아빠와 내가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고민 상담을 할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술에 문제가 있던 아빠는 술을 끊었고, 우리 가족이 해체된 것도 아니고, 아빠는 자신과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이만한 당위성은 만들어내기도 힘들 텐데. 이게 주말드라마여도 나는 기특한 딸 역할일 텐데.     


행복하지가 않다. 믿을 수 없었지만 내가 줄곧 가장 바라 왔던 아빠의 회복은 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다. 아빠가 달라진다고 나도 자연스럽게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상처는 그 문제를 공부한다고 아무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 01화 어느 날 아빠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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