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바니타스 07화

백화점에 갔다

늘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은 훔치기에 아주 적합한 조건이었다.

by 배고파

어제 부로 나의 고용계약이 끝났다.

계약직이 뭐 그렇지… 난 내 자신에게 줄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백수 1일차이므로 크게 잉여로운 테가 나지 않겠지, 끊임없이 스크린도어에 내 모습을 비추며 최대한 계획 있어 보이는 직장인 행세를 했다. 일부러 군중속에 묻히려 출근시간에 나왔다.


을지로 입구 9:40분.

늘 그렇듯 잠을 설친 관광객, 10시 출근제 직장인 그리고 내가 있었다. 역을 빠져나와 백화점 명품관과 본관 이음 통로로 들어가니 개장준비를 마친 신선한 냄새가 나는 홀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분명히 정시에 오픈한다고 흰 장갑 낀 손을 내 얼굴에 들이밀겠지?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나를 흴끗거리며 판단하려는 그 속셈 모를줄 아나? 백수 취급하지 말라니까?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야지.’

직장인일 때는 우아하고 고상하던 인내심과 관대함이 피해의식으로 그새 변해버렸다. 10분쯤은 넋놓고 기다려줘도 되는 찌질이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곧장 엘리베이터를타고 10층으로 향했다. 늘 마음속 장바구니에 넣어 놓았던 커피머신을 먼저 사고, 사은 행사중인 상품권을 챙겨서 그걸로 또 쇼핑해야지.


순간, 피융- 하며 백화점전관이 재부팅되듯 엘리베이터의 전원이 꺼졌다. 두려움을 온몸으로 감지하여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전원이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민첩한 반사신경으로 네발로 뛰쳐나왔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가정관의 화려한 조명이 동시에 꺼지고 직원들은 비상구로 우르르르 빠져나간다. 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도망가려 했지만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사로잡힌 공포감에 숨쉬면서 동시에 소리지를 박자를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멀리서 안전요원의 무전소리가 들렸다.


“개장시간 연기, 코드 레드 코드 레드” “10층 A B C 구역클리어.” “클리어!” “현재 3-2층간 중앙분수대 XX대표추정 시신발견. 경찰오기전 까지 모든 녹화 테잎 CCTV 삭제, 알람 센서 정지 명령. ”


나는 활기를 잃은 온갖 감지센서, 도난경보벨, CCTV 모두 생명을 잃은 야생의 물품 정글과 같은 백화점을 바라보며 훔치기를 결심했다. 나의 지문과 흔적을 잡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도 잠시 스쳐갔지만 분명 지난 주말 여기를 왔다간 고객 모두를 용의자로 몰지 않을거라 합리화하며 내 백에 17만원짜리 독일제 파이커터, 비매품 샘플용 커피 캡슐 한 다스, 프랑스제 주물 찾잔을 쓸어 담았다. 10시 13분.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것, 사소한 것, 럭셔리한 것만 골라 담자. 유기농 바닐라오일 30미리. 샘플용 면티 한 장. 내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이러다 센서가 다시 작동하겠지? 포장지부터벗겨서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10:26분. 시간을알리는 핸드폰의 액정마저 불안한듯 검정액정이 어두워졌다. 파이용 커터칼의 안전장치를 제거해보니 포장되어있던 박스가 꽤 컸다. 그안에 내가 가져온 모든 물품의 바코드, 안전핀을벗겨서 집어넣고 박스를 창문밖으로 던졌다. 내 손짓은 본능에 가까웠다. 마치 이날을 위해 평생 잠겨있던 순발력이 끄집어 올려진 느낌이었다. 10시 30분,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음악소리도 들린다. ‘어서오십시오~ 오늘도 저희 백화점을~’

빨리 화장실에서 나와야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급하게 넣다 손을 베었다. 급하게 휴지를 한웅큼 쥐어 손을 칭칭감는다. 슬금슬금 기어나와 비상구에 숨어 분위기를 살핀다…




아무도 모르는 XX대표 실종사건의 날, 나는 백화점에 갔다..

그리고 나는 내 피가 묻은 훔친 칼을 화장실에 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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