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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이 끝났다. 3년 만에 복직했다.

3년 만에 데스크톱 앞에 앉았다

by 루나리


‘삐삐삐삐’


알람이 울렸다. 카메라와 전화기로만 쓰였던 내 핸드폰이 처음으로 알람소리를 내었다.

나는 3년 동안 아이들의 생활리듬에 맞추어 365일 24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자면 나도 자고, 아이들이 일어나면 나도 일어났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웃었다. 이런 생활에서 알람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나의 육아휴직은 끝이 났고, 2025년 새해 첫 날 나는 복직했다.


춥지 않은 겨울날 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끝이 아려왔다. 눈물이 나서인지, 아니면 부담스러움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갔다.


회사가 위치한 서울역에 내렸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개미떼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되어 재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반가운 옛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다. 50명이 채 되지 않은 소규모 회사라 이직이 잦은 곳인 데에도 불구, 남은 동료가 한둘 있었다. 친한 사람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됐다.

동료에게서 회사의 이런저런 소식을 들었다. 모든 회사가 그렇듯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고 그래도 살아진다. ‘똑같다. 우리 집이랑‘ 푸훗 웃음이 났다.


팀장님은 최근 승진한 꼼꼼하고 능력 있는 분이었다. 이게 설렘인지 떨림인지 모르겠다. 과제명을 붙잡고 한참을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친했던 동료들이 퇴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으니 각개전투를 하고 있었다. 외롭고 고되었다. 시계를 흘끗 쳐다봤다. 겨우 10시였다. 모니터를 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이게 나의 미래인지, 현재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그저 깜깜한 화면이 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혼잣말하면 안 돼, 혼잣말 금지야’

혼잣말을 하면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혼잣말을 자주 하게 된다.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메모를 할 수 없으니 내 기억력을 믿어야 하는데, 이 기억력은 참으로 가늘고 용량이 적어 혼잣말에 의존해 하루를 보냈다. 이제 이 혼잣말도 못 하게 된 것이다. 정신 차리자, 혼잣말 금지.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예전 팀 동료가 내게로 다가왔다.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쭈르르 둘러앉았다. 동료와 나는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육아와 회사일을 병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토해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건 나의 이야기였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여기 있었다.


“애 키우는 건 전부 돈이에요. 돈 벌러 다니는 거지요, 뭐”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우리는 모두 회색분자가 되어 있었다.




“00번 지원자, 여기에 왜 지원했죠?”

“네, 저는 이전 직장인 00에서 00의 필요성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


여느 곳처럼 이 회사에서도 지원동기를 물어봤었다.


서울역에서 일하고 싶었다. 숭례문이 보이는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핸드폰 배경화면도 회사 로고로 바꾸었다. 나는 간절했다. 그리고 회사에 입사하게 된 날, 나는 비로소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이 회사는 나에게 닿지 않은 꿈, 그 자체였다. 면접장에 앉아있는 후보들 모두 간절하게 지원동기를 얘기하고, 미래를 꿈꾸었다. 최종합격 전화를 받은 날에는 눈물이 났다. 이곳에 뼈를 묻을 거라 다짐했다.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는 이제 이곳에 없다. 서울역 개미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충분히 벅차고 힘들었다. 퇴근과 동시에 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업무를 하고 새벽에 잠든 하루의 반복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이건 모두 내가 원했던 길이고 남이 다녀간 길이었다. 모두들 이렇게 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었다. 서울역 개미떼, 자꾸 그 개미떼 생각이 났다.


“제가 살게요”

동료들에게 커피를 쐈다. 이건 그들을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거였다. 하지만 커피가 쓰다. 매우 쓰다.




오후엔 뭘 했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퇴근시간이 되었고, 나는 있는 힘껏 전철역으로 내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고. 퇴근 후 달리기, 오늘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유 행위.

우리 집은 서울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환승이 여러 번이라 하나만 삐끗해도 20, 30분이 사라졌다.


나는 3년 동안 오늘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복직하면 어떡하지, 복직하면 잘할 수 있을까, 복직 1개월 전인 12월엔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그래서 애들을 데리고 훌쩍 떠났다. 애써 떠난 외국에서 복직 전화를 받았다.

행복해야 했다. 남은 힘을 쥐어짜서 아이들과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제 복직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말이다.


알람을 맞추고 또 맞췄다.

톱니바퀴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화양연화는 끝났다. 최대한 튀지 않는 선에서, 몸을 웅크리고 시곗바늘이 움직이도록 나를 갈고 또 갈아야 하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 나는 없다. 조직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야 하는 직원 1일 회색분자일 뿐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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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