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속감을 원한다. 무리에, 집단에, 가족에, 사람들 사이에 소속되기를 말이다. 인류의 뇌가 발달하기 전인 원시 시대부터 인간들은 집단을 만들어 생활했다. 약한 인간이기에 뭉쳐서 크고 위험한 생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인간들은 무리에서 누군가를 추방하기도 하며 공동체를 지키려고 했고, 그로 인해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류도 있었다. 이렇듯 인류의 세포 속에 각인 된 전대의 본능은 유대감과 소속감으로 이어져 왔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본능. 이 본능은 한 천재에게도 각인되어 있었다.
현 인류 중 나를 뛰어넘을 과학자는 없다. 생명에서도, 기계공학에서도, 천문학에서도. 해수면 상승으로 인간이 디딜 땅이 사라진 당시에도 내가 만든 방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과학계의 선구자이며 인류의 메시아였다. 그래. 모두가 나를 추앙해도 마지않을 영웅인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내게 상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허락한 건 끊임없는 연구와 고요한 실험실, 그리고 작은 창문뿐이다.
방주의 가장 뒤쪽에 있는 실험본부와 그 끝에 달린 작은 창문 하나. 창문 밖에는 질척거리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출렁거리기만 하는 짙은 남색의 바닷물은 내게 거대한 고독이나 다름없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죽을 때까지 이용만 당하는 건가. 그들이 내게 요구한 인구수 보존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곧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그때, 생각의 홍수 사이로 들려온 띠링거리는 알림음이 나를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서둘러 들어 올린 휴대폰에는 연락이 하나 와 있었다. 여자친구인 지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미안해 자기. 일 때문에 이번 주 면회는 못 갈 것 같아요.'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지만,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하지도 않는 SNS 염탐 계정을 만들어 여자친구를 찾았다. 겨우 찾은 여자친구의 계정에는 충격적인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내가 보낸 돈으로, 내가 사 준 가방을 메고 다른 남자에게 팔짱을 낀 그녀가 보였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쥐어뜯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식물 보존 구역에서 이상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식물 보존 구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멸종 위기종인 식물들을 모아놓고 관리하는 곳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였다. 나는 커다랗고 동그란 문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개폐구를 열었다. 그러자 진한 꽃향기가 풍겨 나왔다. 향기가 시작된 구역의 끝자락에는 유리관 속에 놓인 튤립 계열의 변종 꽃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 가보니 커다란 보라색 꽃의 주변에 작은 새싹들이 자라난 게 보였다. 분명 외부와 단절된 상태일 텐데, 꽃은 스스로 수정을 하고 씨를 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위해 나는 잠시 유리관을 열어 꽃을 살펴보았다. 커다랗고 움푹 파인 암술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여러 개의 수술이 일제히 암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가수분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너...너희도...갇혔잖아...근데 왜...나만...나만...혼자야..."
나는 나도 모르게 꽃을 째려봤다. 보라색 꽃은 나의 마음도 모르는지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며 암술과 수술끼리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가수분하는 개체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명령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이게 인구수 보존을 해결할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험을 거듭할수록 희망은 사라졌다. 식물의 수정 방식이 포유류에게는 적용되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지금껏 죽은 실험용 쥐들을 던져놓은 상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냐...이...이게 맞을 거야... 다시... 다시 하면 돼..."
나는 실험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실험용 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쥐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 때문이야.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한 너 때문에 모두 죽었어. 나는 잠시 비틀거렸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 때문에 헛된 시간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애초에, 내가 정말 바라는 게 뭐지. 대답해 줄 사람도, 스스로 내세울 답도 없었다. 다만 끝없이 고요한 실험실 안에서 번뜩이는 빨간 눈들만이 시끄럽게 속닥거릴 뿐이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쥐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무언갈 갉아먹는 소리. 나는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그... 그만해..!"
귀를 막으니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다리가 축축해지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있을 리 없는 바닷물이 실험실 바닥을 가득 채우며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나는 힘겹게 다리를 옮기려 했지만, 파도치는 바닷물은 내 다리를 꽉 부여잡고 놔주지 않았다. 목젖 부분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콧구멍을 향해 흘러들어와 내 기도를 틀어막고 숨을 뱉는 걸 불허했다. 점차 잠겨가는 몸과 감기는 눈 사이로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혜가 보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뜨니, 나는 실험실 문 앞에 손을 뻗은 상태로 꼴사납게 쓰러져있었다. 조용한 실험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찍찍거리는 쥐새끼들 빼고는 없었다고. 나는 쥐들이 담긴 철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씨발, 좀...좀 닥...닥치라고."
쥐들 중 한 무리가 충격에 놀라 도망가다 한 놈을 무참히 밟게 되었다. 원래 서로 아끼던 무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찍찍거리는 생쥐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나는 멍하니 철창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수정 방식을 바꿀 수 없다면, 기존 체계를 붕괴시키고 다시 쌓아 올리면 되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문자였다. 진호는 휴대폰을 들어 아까 본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진호야. 네가 와줬으면 해. 연구에 도움 줄 사람은 역시 너뿐이더라.'
진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주 실험 당시 홀로 고고한 척하던 천재의 문자 아니던가. 그가 최근 다른 실험실 동료들을 하나둘 부른 건 알고 있었다. 진호는 자신을 부르지 않은 천재의 모습에 과거에 살짝 따돌린 걸 복수라도 하나 싶었다. 하지만 모든 실험실 동료들을 부르고도 연구가 진척되지 않은 모양이지. 진호는 가슴을 한껏 펴며 실험본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지혜에게 안부 문자를 넣었지만, 그녀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진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껐다.
"콧대만 높아져서는..."
천재의 애인이 아니었다면 진호가 지혜를 만날 일은 없었을 거다. 못생긴 게 주제도 모른다며 진호는 짜증을 냈다. 하지만 실험본부가 보이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래도 그 여자는 이 재수 없는 놈을 버리고 날 선택했어. 진호는 실험본부의 문을 두드렸다. 빨간 레이저가 나와 진호를 스캔한 뒤, 문이 덜커덩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내려가자 철문 뒤로 방주 지하의 실험본부가 드러났다. 수많은 컴퓨터와 그래프가 띄워진 모니터 뒤로 피폐한 몰골의 천재, 현성이 보였다. 그는 쓰고 있던 비니를 더욱 푹 눌러쓰며 말했다.
"어, 지...진호야... 잘 왔어..."
천재라고 불리던 젊은 과학자는 진호를 보고 한껏 웅크린 모습이었다. 진호는 기세등등해져서는 현성의 어깨를 감쌌다.
"애들은?"
"아...아래에 있어... 그보다 면접을..."
"면접?"
진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현성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쩔쩔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형...형식적인 절차야..."
현성은 오히려 진호를 대접하듯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진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천재의 모습에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자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호가 자세히 보니 책상 위에 놓인 붉은 포도주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부르는 게 값인 로마네콩티였다. 천연덕스럽게 자리에 앉은 진호는 말도 없이 포도주를 따 마셨다. 한 잔 두잔 넘기면서 면접 아닌 면접을 하다 보니 진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진호는 감기는 눈 사이로 보이는 어벙한 얼굴의 현성을 비웃으며 잠들었다.
눈을 뜨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에는 다리와 묶인 손, 그리고 멀어져가는 복도가 보였다. 머리를 잡힌 채로 끌려가는 중인 것 같았다.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려고도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눈을 껌뻑이는 게 최대의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끌려갔을까. 지독한 꽃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향기는 점점 강해져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기계장치들이 움직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꽃향기와 꽃가루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머리채를 잡은 누군가는 내 몸을 돌려 나를 고정시켰다.
"지...진호야 보여?"
내 머리채를 잡은 현성의 모습이 보였다. 이 망할 놈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현성의 뒤로 보이는 꽃향기의 정체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게 느껴졌다. 꽃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건 내게 익숙한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실험실 동기들,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지혜. 그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고, 길어진 목 아래로 하나로 합쳐진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목 근처에는 거대한 꽃잎이 감싸져 있었고, 모두의 머리에 빽빽하게 자라난 돌기에서는 연보라색 가루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머리에도 떨어지는 연보라색 가루. 그들의 모습에 몸 전체가 떨려왔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거냐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살고 싶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천재는 싱긋 웃으며 천천히 비니를 벗었다.
"무...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인류 수 보...보존 프로젝트는 성...성공했어. 이제 우...우리는 모두 영...영원히 함께야."
비니를 벗은 현성의 정수리에는 그들과 같은 돌기들이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서도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감각. 나는 천재의 손에 이끌려 그 거대한 무리를 향해 내던져졌다. 그들의 손이, 팔이 뻗어 나와 나를 잡아끌었다. 천천히 뭉쳐지는 감각과 환하게 웃는 천재의 얼굴. 그제야 나는 왜 그가 천재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