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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단편, 소설

by 이재 다시 원


누군가 행복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불행해진다. 동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자신의 행복을 가져간 이는 누구일까 떠올렸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한낮인데도 동은은 깨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넓은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는 풀어 헤쳐지고 뒤엉켜, 부풀어 올라 있다. 눈 밑은 거무스름하게 그늘졌다.


"아 맞다. 뭐라도 먹으라고 했었지."


출근한 남편의 말을 겨우 기억해 낸 동은은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났다. 그녀는 부엌 구석에 있는 하얀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 그것을 열어보았다. 냉장고 안, 세 번째 선반 위에는 남편이 만들어놓고 간 음식이 있었다. 서툴게 만들어진 유부초밥은 흰 접시 위에 놓인 채로 랩으로 감싸져 있었다. 동은은 유부초밥을 향해 손을 뻗다가 냉장고 안에서 손을 멈추었다. 냉장고 안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선천적으로 자궁이 차가우십니다."


정중하지만 딱딱한 목소리의 의사가 한 말이다. 그는 검은 뿔테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리며 말을 이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환자분은 임신이 힘드실거란 말입니다."


띠링, 띠링. 냉장고의 알림음이 울리는 바람에 동은은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났다. 냉장고 앞에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은 동은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뜨거운데... 어디가 차갑다는거야..."


한참이 지나고 집에 들어온 동은의 남편은 냉장고 알림음이 울리는 부엌으로 향했다. 거기서 얼굴 전체가 눈물로 범벅 진 동은을 발견한 그는, 동은을 오래도록 꼬옥 껴안았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동은을 안아 침대로 옮기고.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남편이 동은에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 대리모 쓰자."



서현은 부푼 배를 이끌고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향하며 숨을 헐떡인 그녀는 화장실에 달린 작은 거울 앞에 섰다. 임신 막달이 되니 걷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구시렁대며 세수를 한 후 서현은 거울을 봤다. 거울 안의 그녀는 두꺼운 쌍꺼풀에 노란 피부, 둥근 코를 가지고 있었다.


"살이 더 찐 것 같아."


그녀는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볶음밥을 꺼내려고 구석으로 향했다. 한 칸짜리 방구석에 있는 미니 냉장고.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서현은 뒤뚱거렸다.


"엉덩이도 부풀었네. 오리궁뎅이도 아니고."


서현은 자신의 걸음이 퍽 우스워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땀을 흘리며 천천히 다리를 굽혔다. 허리는 도저히 숙일 수 없어 쭈그려 앉은 그녀는 냉장고에서 볶음밥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냉장고에서 띠링 거리는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 이 고철 덩어리가."


서현은 냉장고의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알림음은 냉장고 문을 닫아도 계속되었다. 서현은 조만간 냉장고 수리기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칸짜리 방 안에 가득 울리는 알람을 사이에서 그녀는 볶음밥을 의식적으로 퍼먹었다.


서현의 직장은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 주변에 있는 한 대형 마트였다. 그녀는 그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몸도 정신도 뱃속에 들어찬 아이 때문에 힘든 그녀였지만, 일을 쉴 수는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빚이 그녀를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현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한낮이 지날 동안 자리에 서서 포스기를 찍던 서현에게 쉬는 시간이 왔다. 서현은 휴게실로 가서 의자에 넘어지듯 앉아버렸다. 퉁퉁 부어버린 다리를 한 손으로 두드리며, 서현은 반대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한 사람의 인스타로 들어갔다. 어린아이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고, 서현은 그 사진을 올린 사람의 프로필을 눌러 사진을 본격적으로 보았다. 사진 속 어린아이는 두꺼운 쌍꺼풀에 둥근 코를 가진 하얀 아이였다. 서현과 은근히 닮은 아이의 사진은 온통 활짝 웃는 사진들이었다.


"어머 누구야? 서현씨랑 판박이네."


휴게실에 들어온 동료 아줌마가 서현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서현은 놀라며 휴대폰을 서둘러 품에 넣었다.


"그냥. 모르는 애에요."


"그래? 너무 닮았는데?"


"아, 그. 친척 동생이에요."


사진 속 아이는 서현의 친척 동생이 아니었다. 서현의 배에서 나온 아이.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그녀를 떠난 아이. 서현이 첫 대리모 일을 할 때 낳은 아이의 사진이었다. 서현은 방금 본 아이의 사진을 떠올리며 자신의 부푼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가 만날 부모도 내가 아니겠지.


서현은 다시 계산대 앞에 섰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이 한산했다. 그때, 저 멀리 식품 코너에서부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트에 잔뜩 물품을 담은 한 부부가 서현이 맡은 계산대 앞에 섰다.


"여보, 아까 본 신발도 좀 가져와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거?"


"핑크색 리본 달린 거. 안 잊혀져. 우리 영은이 꼭 입혀줘야겠어."


"알겠어. 금방 다녀올게."


남편은 서둘러 복도 끝 쪽의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그동안 아내는 카트에 담긴 물품을 하나 둘 계산대에 올렸다. 아기 옷, 아기 신발, 분유, 아기 모빌. 카트에 담긴 물건들은 하나같이 아기용품이었다. 서현은 프릴이 달린 땡땡이 옷의 바코드를 찍었다. 그런 서현의 부푼 배를 빤히 바라보던 아내가 말했다.


"몇 개월 됐어요?"


여자의 말에 서현이 여자를 올려다봤다.


"아, 이제 10개월 됐어요."


"와 정말요? 축하해요!"


여자는 상기된 얼굴로 서현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아기를 가진 기분은 어떤지, 태몽은 어떤 걸 꿨는지. 서현은 그중 어느 것에도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다.


"아기용품을 많이 사셨네요."


서현은 말을 돌리기 위해 여자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여자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 네. 이제 곧 엄마가 될 거라서요."


"축하드려요."


서현은 여자의 배를 힐끔거렸다. 타이트한 푸른 반팔을 입은 여자의 배는 홀쭉했다. 이윽고 남편이 아기 신발을 들고 돌아왔고, 부부는 계산을 마친 뒤에 자리를 떠났다. 서현은 그들이 계산대를 뜨고 나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배에서 꿈틀거리는 태동이 느껴졌다. 서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일을 마친 그녀는 마트를 나서는 길에 프릴이 달린 땡땡이 아기 옷을 보았다. 그녀는 고민하다 그 옷을 사들고 길을 나섰다.


서현은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냉장고 옆 선반 위에 사들고 온 아기 옷을 올려뒀다. 서현은 휴대폰을 켜 의뢰인이 적어둔 오늘의 저녁 식사를 확인했다. 소고기 스테이크에 버섯 구이. 서현은 냉장고에서 안심스테이크 한 팩을 꺼냈다. 그러자 냉장고에서 띠링 거리는 알림음이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서현은 그 소리를 무시한 채로 당근을 꺼내고, 양파와 버섯을 꺼냈다. 알림음은 점차 심해졌다. 아니, 점점 크게 들렸다. 음식을 꺼낼수록, 떼를 쓰는 듯한 냉장고의 소리는 극대화되었다. 그때, 서현의 배에서 강한 진통이 느껴졌다.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았다. 서현은 무심코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선반 위에 놓인 아기 옷을 바라보았다.


띠링, 띠링, 띠링. 응애.


동은은 요즘 매일 행복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딸 덕분이었다. 대리모를 통해 얻은 딸은 날이 갈수록 자신의 남편과 닮아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과도 조금은 닮은 것 같아 동은은 더욱 기뻤다. 동은은 꼬물거리며 잠을 자는 아기의 발을 만져보았다. 어쩐지,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 싶어졌다. 동은은 잠든 딸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아기의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그것을 인스타 게시물로 올리고, 다시 딸을 바라보았다. 동은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현은 인스타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프릴이 달린 신생아용 옷을 입은 아이가 잠든 사진이 펼쳐져 있다. 서현은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무릎을 감싸안았다. 서현의 옆에 있는 냉장고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 든 음식들은 모두 밖으로 꺼내져 있었다. 띠링 띠링 울리는 알림음을 들으며, 서현은 냉장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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