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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에세이

by 이재 다시 원

중재자였던 아이, 회피하는 어른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어째서 누군가를 온전히 의지할 수 없는 걸까. 누군가를 의지하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인간의 현재 행동은 단순한 의식적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과거의 경험이나 감정, 욕구 같은 것들의 복합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 역시도 그 무의식의 힘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의 무의식은 부모님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졌다. 안정적인 울타리가 돼야 했을 가정은 나에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전쟁터와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 사이에 내가 끼게 되면서부터 문제는 더욱 심해졌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결함을 토로했고,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분 사이의 균열을 메꾸는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이 싸움을 멈추고 나를 사랑해주길. 하지만 그런 욕망은 나의 도덕적 기준 속에서 억압되었다. 나는 언제나 착하고 경청하는 아이여야 한다는 기준 말이다. 어쩌면 그런 기준조차 부모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만든 걸지도 모른다. 가장 사랑해야 할 두 분이 서로 다투고 서로를 버리기 일보 직전처럼 보이는데. 나라는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어디서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얻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나는 나의 감정이나 진심, 솔직함 등을 억압했고, 이러한 것들은 내 무의식 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흥미롭게도, 그리고 지금의 내가 바라보기엔 구슬프게도, 나는 내 남동생에게만큼은 이 감정의 전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깨끗하고 따뜻한 환경을 주고 싶었고, 부모님의 싸움이 그의 삶까지 오염시키는 걸 막고 싶었다. 어쩌면 동생을 보호함으로 인해서 더 어렸던 과거의 나를 보호하는 기분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나는 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더욱 침묵하였다.


인간이 일관된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초기 양육자에게서 충분한 공감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초기 양육자였던 나의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역전된 관계를 보여주셨다. 나는 부모님의 자기대상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통해 자신들의 불안과 결핍을 메우고자 하셨다. 그렇게 나는 성숙한 어른아이로 자라났다. 정작 스스로를 지지해줄 자기대상은 없는 상태로 말이다. 이런 환경은 나로 하여금 감정적 독립을 강요했고, 나는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모른 채로 스스로를 억압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결국, 나는 회피형 애착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났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나 불안했으니까. 감정 표현이나 솔직한 말은 위험한 일처럼 느껴졌다. 대신에 나는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렸다. 나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자책하며 무의식 속에 감정을 숨기곤 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는, 나뿐이니까. 내가 욕할 수 있는 요소도 나뿐이니까. 그렇게 나는 자기검열이 심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내가 받은 상처를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감정이라는 것은 내가 통제 가능할 때에만 안전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감시하고 꾸짖으며 겉으로는 괜찮은 척을 하고. 무의식 속으로 감정을 밀어 넣는 일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가장 잘하는 것을 뽑으라면 '괜찮은 척'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를 가장 잘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상처는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망설임 없이 내 시간을 내어준다. 그래야만 나도 안전할 거라는 오래된 습관과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완전히 지쳐있다.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감정들은 내 무의식 속 어딘가에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그들은 문득 떠오를 때마다 나의 숨을 턱하고 막히게 한다. 가슴 밑바닥에서는 늘 울음이 잔잔하게 차오르지만, 그 울음을 꺼내는 법을 나는 모른다. 아니, 꺼낼 수 없도록 너무 오랫동안 덮어두었기 때문일까. 그게 덮어진 상태 자체가 굳어져 내가 된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나를 의지해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일까. 결국, 나는 스스로에게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 의지는 다정한 위로가 아니었다. 끝없는 자기검열과 자기 비난, 그리고 나라도 나를 다잡아야 한다는 비틀린 책임감이었다.


참 이상한 방식의 사랑이었다. 나를 꾸짖고 다그치고, 더 잘해야 한다고 몰아세우는 것으로 나의 유일한 방어막을 세우곤 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나는 지금도 관계 앞에서 너무나 쉽게 도망친다. 기대는 법을 몰라서, 기대는 것이 무서워서. 누군가 내 곁에 오래 머물겠다고, 남겠다고 말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묻는다.

"정말 괜찮을까. 정말 나를 떠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기대지 말자.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상처도 없으니까."


그 오랜 회피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는 결국 사랑받지 못할까 봐 먼저 사랑을 밀어냈다. 거절당하기 전에, 버려지기 전에, 실망하기 전에. 나 스스로 먼저 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선 밖에 남겨진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정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제는 괜찮은 척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울고 싶을 때 울고, 나약해지고 싶을 때 나약해지며 누군가에게 기대어서 쉬어도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에게 허락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오랫동안 잃어버렸을 '나'를 되찾고 싶다.


나를 돌보는 방법은 나를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슬픔과 두려움, 불안 같은 것들을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 마치 오랜 기간 외면한 친구를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나는 아직 서툴고 불안하지만 내 안에 숨은 작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제는 괜찮아. 더는 혼자 버티지 않아도 돼."


내 회피는 나의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때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정교한 방어이자, 내가 살아남기 위한 나의 오래된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전략을 조금씩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것을 말이다.


상처는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듬는 법을 배우는 이 과정에서, 나는 다시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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