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늘 깨어있고 싶지 않았어. 세상의 소리는 내게 비명처럼 크게 들렸으니까. 그래서 귀를 막고 잠을 청했어. 하지만 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손톱이 뒤집어질 정도로 벽을 긁어대는 이 악귀는 뭘까.
우리는 때때로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살아 있다는 것, 숨을 쉬고, 하루를 살아내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는 그 모든 행위가 때로는 그저 의무처럼 느껴진다. 무슨 이유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할까? 왜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고통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 인간은 고통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필연적으로, 고통이 있다면 행복도 있는 것. 인간은 행복 또한 느끼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하지만 이 글은 그저 그런 행복 찬양글이 아니다.
우선, 내 안의 고통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다. 슬픔이란 말은 입에 올리면, 그것이 마치 일시적인 감정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하지만 나의 고통은 그렇지 않다. 이 고통은 한 번 느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끝자락을 잡으려 해도 끝이 없다. 그것은 존재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처럼 내 안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세상의 소리는 내게 비명처럼 크게 들리지만, 그 소리는 나를 완전히 마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내 안에 자리 잡고, 더욱 크게 울린다. 이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것이 나를 정의하는 이유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내가 그 소음을 듣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래서 귀를 막고 잠을 청했어.
내가 잠에 들고 싶은 이유는, 그저 세상의 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소음 속에서 나는 잠시라도 쉼을 원했다. 잠은 내가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유일한 길은 사실, 잠시나마 나의 고통을 숨겨두는 것에 불과했다. 그 고통은 내가 잠든 사이에도 여전히 내 안에서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며 나를 흔들었다. 잠에 빠져들수록, 그 고통은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꿈틀거리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저 이 잠이 깨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나의 고통은 잠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정신상태를 대변하듯, 기하학적으로 뒤틀리는 꿈 속에 영원히 갇혀 악몽만을 반복하게 됐다. 그리고 나에게, 잠드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버티기 어려운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내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손톱이 뒤집어질 정도로 벽을 긁어대는 이 악귀는 뭘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는 너무 생생하고 아프다. 그것의 크기에 도망가버리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 고통은 내 안에서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려는 악귀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는 나에게 괜찮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고통 속에서 힘겨워한다. 왜냐하면 내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치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또다른 깨달음이 내게 왔다. 아프다는 건, 고통스럽다는 건, 무뎌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허무함도, 분노도, 슬픔도.. 세상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그 중심에서 분명하게 살아있는 내가 울부짖는 소리도..
이런 고통이 있다는 건, 바라는 게 남아있다는 뜻이다. 아직 올라가고 싶고, 간절히 원하고, 느끼고, 잃기 싫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결국, 악귀는 나였다. 나는 울부짖음으로써 나를 놓지 않는 선택을 한 것이다. 나조차 외면한 나를, 나는 놓지 않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악귀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뭐라고 해줘야 할까? 미워만 했던 존재에게 이제는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할까.
고마워
너 덕분에 나 아직 여기 있어
이건 약속이 아니다.
악귀를 사랑하겠다는 것도 받아들이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