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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Jan 18. 2024

최후가 아닌 최후의 만찬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네 명이 마주 앉았다. 코스 요리가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질 때마다 쉐프의 요리 설명이 끼어드는 순간을 제외하면 대화가 멈추지 않았다. 10대 한 명, 20대 한 명, 30대 한 명, 40대 한 명으로 나이대가 모두 달랐음에도 분위기는 하나로 모였다. 좋은 식재료가 근사하게 재탄생한 요리의 맛에 감탄하며 함께 쌓아온 시간에도 감탄했다.      


10대는 딸, 20대는 딸의 반주 선생님, 30대는 딸의 바이올린 선생님, 40대는 나였다. 21년 2월부터 시작된 바이올린 레슨의 마지막 수업이 어제 있었고, 마지막 레슨이 아쉬워 최후의 만찬을 함께 했다. 사실 예정된 마지막이었다. 나도 잊고 있었는데, 바이올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첫 레슨 때 이미 아이가 중학교 진학할 때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단다. 시작부터 끝을 알고 있었어도 마지막은 어려웠다. 마지막 레슨일과 식사 약속을 한참 전에 정해두고 식사 장소 후보도 여러 군데를 알아 뒀지만 예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식당과 통화가 뭐라고 마음이 울컥거렸다.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1인 1악기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됐다. 2학년 참관 수업에서 학교 바이올린 선생님의 권유로 개인 레슨을 시작했는데, 3학년 때 제주도로 이사하며 아이는 레슨을 잠시 쉬겠노라 했다. 무서운 선생님도 싫고, 버거운 연습도 싫다는 이유였다. 실력이 퇴보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아이의 요구를 따랐다. 아이 말을 들어주는 너그러운 엄마를 흉내 냈지만 진실은 나의 무면허에 있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가거나 택시를 타야 하는데 매번 그렇게 시내로 레슨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봄에 제주로 이사하고 가을에 면허를 취득하고 겨울이 되자 시내 운전에 자신이 생겼다. 아이도 다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기에 제주에 이사 오기 전부터 소개받았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서울에서는 여자 선생님께 배웠는데, 남자 선생님이셨다. 무서운 선생님을 다시 만나면 바이올린이 싫어질지도 모른다는 아이의 엄포가 있어 염려했지만 염려일 뿐이었다. 곡에 대해 설명하는 아이의 엉뚱한 말도 끊지 않고 들어주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티칭에 아이는 첫 레슨부터 선생님께 홀딱 빠져버렸다.     

 

첫눈에 반한 선생님에 대한 아이의 애정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점점 커지기만 했다. 6학년 여름방학 숙제로 버킷리스트 쓰기가 있었는데 ‘선생님과 무대 서기, 돈 많이 벌면 선생님께 밥 사드리기, 선생님과 베토벤 교향곡 1번과 드보르작 교향곡 7번 연주해보기’를 써둔 것을 보고 선생님을 향한 아이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마냥 좋은 말만 해주셔서 아이의 애정도가 높은 건 아니었다. 혼나고 운 적도 있었는데 그날 레슨이 끝나고 아이는 자신의 속상한 마음보다 자신에게 실망하셨을 선생님의 마음을 걱정했다. 최근 두 달 남짓을 제외하고는 나도 레슨에 함께 들어가 참관했는데, 아이만큼 나 역시도 선생님을 좋아했다. 바이올린을 잘 모르는 나도 쏙쏙 이해되는 설명, 단지 스킬 만이 아니라 음악가, 음악사, 곡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풍성한 대화, 연습에 대한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다독여주는 응원의 힘이 애정을 키웠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레슨 때와는 또 달라 연주자로도 팬이 되게 했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서 선생님의 공연을 쫓아다닌 게 아니라 선생님의 연주가 너무 좋아 공연을 쫓아다녔다. 연주가 바쁜 선생님들은 레슨 시간도 자주 바꾸시고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데 선생님은 연주가 바쁜 시기에도 나를 당황시키는 경우가 없으셨다. 약속을 잘 지키는 어른으로의 모범도 보여주셨기에 신뢰는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만 모이는지 바이올린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반주 선생님도 따뜻하고 다정하셨다. 결이 비슷한 사람들. 아이가 서울에서 연주해야 할 때는 반주 선생님만 동행하셨는데 반주 선생님과 함께 낯선 장소를 향하는 아이를 보며 걱정됐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선생님께서 내 마음과 같은 온도로 아이를 살펴주시리라 믿었기에.      


아이가 인복이 많아 따뜻하고 다정한 선생님들을 만난 것일 수도 있지만 제주라서 제주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며 자신이 편안하기에 다정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 단지 아이의 음악 선생님들이 아니라 3년 동안 나와 아이가 선생님들과 함께 인생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담긴 음악을 나눠서일 수도 있지만 서로를 힘껏 응원하고 보듬었던 마음이 더 앞서는 관계. 그래서 서로에게 무언갈 하나라도 더 나눠주고 싶은 사이. 제주에서 그저 아이의 배움 여정에 머무는 선생님이 아닌 인생의 스승을 얻어 돌아가는 구나 싶어 레스토랑을 나와 서로 포옹을 나누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혹시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도와드릴게요.’    

 

바이올린 선생님의 인사에 최후의 만찬이라 이름 붙인 어제의 식사가 마지막이 아니리라 믿게 됐다. 사실 벌써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4월 교향악 축제에 선생님께서 서울로 공연을 오시는데 그때 공연장에서 만나 뵙기로. 이제 한라산을 바라보며 운전해서 가는 레슨은 없겠지만 아이의 앞으로 음악 인생에 한라산처럼 든든하게 계셔주실 선생님들이시기에 아쉬움을 또 다른 희망으로 바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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