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중학교 진학 문제로 해안가로 나섰다. 해발 180m의 우리 집에서 해안가까지는 차로 15분. 15분을 걸려 나섰는데 볼 일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대로 다시 돌아가기는 아쉬워 해안가 단골 카페로 향했다. 널찍한 주차장이 있어 곧장 카페로 가면 되지만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카페 주차장 진출입로가 내게는 좁은 탓이다. 조금만 크게 돌아 나와도 길옆 바다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긴장감에 매번 5분 걷기를 택한다.
단골 카페로 가는 길
막 오픈한 카페에 첫 손님이었다. 좋아하는 창가 자리가 내 차지. 다음 주 있을 인터뷰 내용을 준비하며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는 등 뒤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북적북적 공기의 밀도가 높아졌지만 소곤소곤 더해지는 말소리는 거슬림이 아닌 온기였다. 혼자 왔으나 혼자이지 않은 느낌에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썼다 지웠다 하며 노트가 3장쯤 넘어갔을까. 웅성거림 속에서 내 이름이 도드라졌다. 착각이려니 자세를 바꾸지 않았는데 한 번 더 내 이름이 들렸다.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자연스레 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친한 이웃이었다.
“조천항에 니 차가 있어서 긴가민가하며 왔더니 너네.”
맞다. 내 소개로 이웃도 이 카페 단골이고, 이 카페는 조천항을 지나서 오게 된다. 카페로 오다가 조천항에 주차된 여러 차 중에 내 차를 발견 이웃. 이미 만석인 카페를 돌아 나서려다 혹시나 해 두 번 훑어보고 내 등을 발견했단다. 뒷모습이 왜 이리 작냐는 타박마저 반갑게 짧은 인사를 나눴다. 이웃이 다녀간 뒤 노트 위 연필에 경쾌한 리듬이 더해졌음은 내 착각인 걸까.
버스가 50분에 한 대 배차되는 제주 시골에 살면 이런 일은 흔하다. 대부분 차로 이동하기에 누구네 차가 무엇인지를 다 안다. 마트 주차장에서 이웃 차를 보면 마트에서 이웃을 찾아 인사하고, 반대편 차선에서 이웃 차가 지나가면 반가운 마음에 비상등을 한번 켠다. 눈길이나 밤길에 차로 나서면 내 차를 발견한 이웃에게 연락이 온다. 운전 조심하라고.
따뜻한 이웃의 관심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사나 호기심이 아닌, 동방예의지국의 면모를 갖추느라 나누는 형식적인 인사가 아닌, 여기에 조금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간섭 한번 보태보려는 오지랖이 아닌, 진심이 담긴 관심이다. 진심이 담겼기에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어 상대방이 불편할 관심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딱 필요한 선까지만 마음을 표현하려는 애씀이 더해져 관심은 환대가 된다.
서울과는 달리 두꺼운 현관문을 기꺼이 열고 서로를 환대하는 삶은 외로울 틈이 없다. 마음의 여유는 관계의 여유를 불러와 내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알게 했다. 사람의 온기도 더 많이 느끼게 됐는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온기가 나를 더 풍요롭게 한다. 여유가 생겨 이웃을 품게 됐고 이웃과 함께 행복하니 마음은 더 여유로워진다. 여유에서 시작돼 여유로 돌아오는 따뜻한 선순환을 오늘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p.232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뒤 다정한 이웃이 아쉬웠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실현되는 공간에서 아이만이 아니라 나까지 보살핌을 받으며 온기 속에 살다가 이글루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아니야, 네가 이웃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잖아. 네 달라진 마음이 네 곁에 좋은 이웃을 만들어 줄 거야.”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이웃의 귤
제주 오기 전에는 몰랐던 이웃의 환대를 알고 서울로 돌아가니,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를 터. 과거에 머물러 아쉬움만 곱씹느냐, 이웃의 말을 현실로 만드느냐는 이제 내 몫이 됐다. 그래, 두고 가는 아쉬움보다는 달라진 나를 데리고 가는 희망이 더 좋겠지. 바로 옆집 사는 사람과 문턱 낮게 오가는 서울의 삶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1,000세대 넘는 대단지 아파트 안에서 제주와 비슷한 환대의 이웃을 한 집은 만들 거라는 다짐을 해본다. 호기심도 형식적인 인사도 오지랖도 아닌 상대의 불편을 헤아리는 환대로 온기를 나누는 이웃 말이다. 너무 큰 욕심인 건가? 한라산아, 내게 용기를 좀 주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