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 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전교생 250명의 작은 학교였다. 작은 꼬마가 청소년이 되어가는 성장사가 뭉클했지만, 졸업‘식’ 자체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짐작대로 흘러가는 행사려니 했다. 나와 달리 졸업식을 준비하는 딸은 짐작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졸업식 준비 회의를 한다고 1시간을 더 학교에 머물렀고, 카톡 알람이 요란해 물어보니 졸업식 준비 단톡방이라고 했다. 대체 무슨 회의냐고 물으면 기밀 사항이라고 말을 아꼈다. 엄마의 기대감을 높이려는 비밀주의 전략인 건가. 여기에서 나아가 딸은 자신들의 졸업식 준비 사항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면서 동생들 준비 사항은 암호처럼 알려줬다.
"4학년은 기타 연습을 하고 있데."
"★★ 동생이 3학년이잖아. 그림을 그렸다는데 뭘 그린 지는 몰라."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학교 앞에 현수막이 걸렸다. ‘대박 행복하게 흘러간 우리의 초등학교 6년’. 아이들에게 공모를 받아 투표를 통해 선정된 문구라고 했다. ‘대흘초’ 3행시였다. 선생님이 준비하고 아이들이 자리를 채우는 졸업식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선생님이 제시하는 방향 안에서 아이들이 내용을 채우는 졸업식으로 없던 기대감은 살아나 점점 몸집을 키웠다.
흰색 상의에 청바지나 검은색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딸은 의상을 갖춰 입고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갔고 나는 10시 졸업식 시작 10분 전에 졸업식장에 도착했다. 5학년과 학부모들이 앉아있는 장내로 오늘의 주인공인 6학년들이 입장하며 졸업식은 시작됐다. 가장 첫 순서는 졸업생들의 졸업 기념 공연이었다. '러브홀릭스'의 'Butterfly'를 율동과 함께 부르며 ‘안녕 잘 있어 대흘초’‘우리 이제 졸업한다’의 카드섹션까지 보여줬다. 카메라 클로즈업으로 잡은 아이들 입꼬리의 높이는 달랐지만 모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며 내 입꼬리도 더 높이 올라갔다.
다음은 졸업 축하 영상이었는데,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반별(학년별 반은 2개다)로 축하 영상을 만들어 상영했다. 러닝타임이 8분이었는데, 8분을 체감하지 못했다. 1학년은 졸업생 한 명 한 명 이름을 들어줬고, 2학년은 개사한 노래를 불렀고, 3학년은 노래에 맞춰 그린 그림을 뮤직비디오처럼 연출했고, 4학년은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연주했고, 5학년은 유머 가득한 ‘축하합니다’ 인사를 직접 찍어 편집했다. 재학생 전체에게 축하 인사를 받는 졸업식. 보는 나의 마음도 채워지는데 딸의 마음은 더 꽉 채워지지 않았을까.
고마워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선배님들 사랑으로 잘 지냈어요 응원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중학교에 가서도 힘을 내세요 중학교 가면은 또다시 1학년이죠 중학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세요 중학교 가면은 온종일 수업을 4시까지 한 대요 축하해요 이 한마디 참 좋은 말 오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2학년의 개사
작은 학교의 매력은 졸업장 수여에서 선명해졌다. 졸업생은 전체 41명.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교장 선생님께 직접 졸업장을 수여받았고, 단상에 오를 때마다 자신의 버킷리스트가 소개됐다. 딸의 버킷리스트는 ‘청소년오케스트라 지도위원 되기’였는데, ‘친구들과 배낭여행 가기’, ‘소중한 단 한 사람 찾기’, ‘1,000피트 상공에서 스카이다이빙하기’, ‘세븐틴 콘서트 가기’ 등 무엇이 되겠노라만이 아닌 다양한 바람들이 나타나 개성을 존중받으며 보낸 시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수능 만점 받기’도 있었는데 아이의 바람을 무모하다 판단하지 않고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것도 졸업식에 감화됐기 때문일 게다.
졸업장 수여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10초 남짓의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수상보다 값진 졸업장인데 수상 소감은 있어야지. 아이들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감사’. 수많은 감사를 포함하는 한 마디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좋은 학교 보내주신 부모님 감사합니다.”
다음은 졸업 영상. ‘환승하시겠습니까?’로 시작된 10분 34초의 ‘환승학교’ 영상이었다. 6학년 담임 선생님들께서 만드신 영상. 아이들이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선생님이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눈빛에서 말투에서 행동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영상이었다. 물론 편집된 영상이기에 선별된 순간들만 담겼겠지만, 거짓 없는 아이들의 툭툭 뱉는 말이 어찌 편집해서 보이는 걸까. 제주 시골에 살기로 마음먹고 이곳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기로 선택한 나를 칭찬해 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왜 아이는 체험학습 쓰고 가는 서울 나들이보다 학교 가는 걸 더 좋아할까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그 의구심이 자연스레 지워지더라.
작은 초등학교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는 더 있다. 졸업생 전부 장학금을 받았다. 총동문회장, 학부모회, 읍 발전회 등의 마음들이 모인 결과였다. 여기에 졸업 앨범도 개인별로 제작됐다. 졸업앨범 뒤표지에 아이 사진만 있는 것부터 심상치 않더니 펼쳐보니 일반적인 졸업식 개인별 사진과 조별 콘셉트 사진 외에 월별 아이의 활동사진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월별 활동사진을 선별하는 등 편집과정에 함께 했다고는 하나 선생님들의 마무리 손길이 많이 보태졌을 텐데. 12월 들어 늘 저녁에도 늦게까지 교실에 불이 켜져 있던 이유였다. 선생님의 감사한 수고로움 덕분에 아이들에게는 추억이 몇 배로 불어나지 않았을까.
다수 중의 한 명이 되는 학교라고 생각했다.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유난하게 까불거리거나. 선명한 특징이 있어야만 기억되는 공간이라 이해했다. 졸업식을 보며 아이는 학교에서 다수 중의 한 명이 아닌 오롯한 자신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학교생활 중에도 느끼기는 했지만 어렴풋하던 느낌이 확신이 되는 자리였다. 한 명 한 명이 빛나던 졸업식. 서울 큰 중학교에 가서도 그 빛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제주 시골 초등학교에 다닌 4년이 아이를 단단하게 키웠으리라. 졸업식에서 나는 희망과 믿음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