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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Feb 15. 2024

중고 거래에서 제주 사람을 구분하는 법

제주에서 서울로의 이사를 준비하며 제일 신경 쓴 건 짐 줄이기였다. 서울집의 짐을 적당히 나눠 제주로 왔지만 4년을 살며 서울집도 짐이 늘고 제주집도 짐이 늘었기에 두 집 짐을 합치는 건 내게 큰 숙제였다. ‘1+1=2’였던 수식이 ‘1.2+1.7=2.9’ 정도가 됐으니 2도 겨우 품었던 서울집이 터져나갈지 몰랐다. 서울집의 짐이야 제주에 있는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제주집의 짐을 줄이는 것이 시급했다.    

  

제일 먼저 줄이기에 착수한 대상은 책이었다. 특히 아이의 성장에 따라 더 보지 않게 된 책들은 반드시 처분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로 이사했건만 유치원 시절 보던 전집까지 들고 왔으니 처분할 책이 3/4 정도였다. 이사 두 달 전부터 중고 거래를 시작하라는 조언을 지인들에게 들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중고 거래 시작과 함께 이사가 현실이 되는 상황이 싫어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결국 이사가 보름 앞으로 다가와서야 중고 거래에 첫발을 뗐다.      


중고 거래로 판매한 책 중 일부

팔 건 많고 마음은 급하니 전략은 싸게 내놓는 것.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같은 책을 검색해 평균 거래가보다 조금 싸게 내놓았다. 그랬더니 거래는 쉽게 이뤄졌다. 처음에는 단지 입구 차단기 비번을 공유하는 것이 맞나 싶어 차단기 바로 밖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만나 책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니 귀찮았다. 약속 시간에 맞춰 단지 제일 안쪽에 있는 집에서 단지 밖까지 나서야 하는데 책은 무겁다 보니 차를 이용했고, 출차해서 주차하고 책을 전달하고 다시 돌아와 주차까지 시간도 꽤 걸렸다. 물론 외출에 제약이 생기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비번을 공유하고 문고리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문고리 거래에는 장점이 더 많았다. 문 앞에 내놓으면 되니 편리했고, 시간 약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게다가 판매가 꺼려지는 중고로 구입한 책들을 모아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무료입니다.’ 메모와 함께 상자에 담아 뒀더니 책이 성큼성큼 줄었다.      


책 뿐만 아니라 장난감도 팔았던 이사 전 중고 거래

처음으로 중고 거래에 성공했던 날, 거래 품목은 유치원 아이들에게 적합한 전집이었다. 구매자는 유치원에서 하원한 아이를 뒤에 태우고 나를 만나러 왔다.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네, 우리은행 ************ 민선정입니다.”

“제주분이 아니신가 봐요?”

“네?”

“제주은행이나 농협이 아니라서요.”     


한 번이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리은행’이라고 계좌를 밝히면 곧잘 “육지에서 오셨어요?”, “제주 토박이는 아니시죠?”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대학교 주거래은행이 ‘우리은행’이라 그때 만든 ‘우리은행’ 계좌를 쭉 써온 것뿐인데 계좌번호 하나로 제주 사람이 아니게 됐다. 모바일 뱅킹을 주로 이용하니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주시에는 우리은행 지점이 두 군데밖에 없었다. 농협은 곳곳에서 보이는 것에 비하면 너무 적은 분포였다. 제주 사람 이용률이 그만큼 낮다는 방증일 터.      


내게도 농협 계좌가 있기는 하다. 제주로 이사와 아이 스쿨뱅킹을 위해 만들었다. 만든 목적답게 스쿨뱅킹으로만 이용했고. 내가 제주에 4년을 살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니면 처음부터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농협 계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을까? 중고 거래를 하며 행정적으로는 제주도민이었지만 진정한 제주도민은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뭘 주거래은행 가지고 그러냐고 타박할 수도 있지만, 제주를 떠나기 싫은 마음이 만든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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