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은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고 정수리는 햇빛의 열기를 가늠하고 피부는 공기의 물기를 가늠한다. 앞뒤 좌우 보고 싶은 곳을 바라보며, 팔은 바람을 가르고, 발은 땅의 굴곡을 느끼고, 다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나는 걷고 있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열리는 생동감을 느끼며, 내가 움직인 만큼 나아가는 정직함을 느낀다. 편한 신발 한 켤레만 있으면 되는 소박함도 좋아 나는 걷기가 좋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p.171
일중독이라고 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던 내가 지금은 산책에 중독됐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자연스레 산책한다. 산책 코스는 계절마다 다른데 처서가 막 지난 요즘은 진분홍 꽃 잔뜩 핀 배롱나무 사이를 걷는다. 최단 거리, 물 흐르듯 매끄럽게 연결되는 동선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 걷는 일도 잦다. 시간 낭비 없이 착착 전개되는 일상보다 내 눈에 담는 아름다움과 내 마음의 두근거림을 따른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곤을 떼어 놓기 위한 커피도 필요치 않다. 각성제는 이제 커피가 아닌 자연이다.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 코끝을 건드리는 향기, 귀를 흔드는 새소리, 발바닥을 자극하는 돌길과 흙길, 눈에 담아도 담아도 또 담고 싶은 나무, 꽃, 하늘, 구름. 저절로 걷는 속도는 느려지고 몸과 마음은 활짝 열린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