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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Apr 25. 2024

음표 가득한 서울에서 만난 쉼표

내가 기억하는 한 취미는 언제나 글쓰기와 독서였다. 입사원서를 쓸 때 뻔함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를 덧붙였던 것을 빼면 말이다. 글쓰기와 책을 좋아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출간 작가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거금을 투자해 시나리오 스쿨에 등록했다. 시놉시스를 발표하는데 나의 상상력은 볼품없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스킬보다 상상력 확장이 더 급했다. 카페에서 사람 관찰을 시작했다.


창가에 앉아 창밖에 시선을 뒀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포착해 물음표를 붙였다. 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을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바삐 걸을까?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저 큰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손 잡은 연인의 심드렁한 표정은 이별 직전이기도 하고, 바삐 걷는 남자는 사기꾼을 추격 중이기도 하고, 커다란 가방 안에는 도시를 날릴 폭발 장치가 들어있기도 했다. 한계 없이 상상의 세계를 넓히다 보면 시간은 겅중겅중 뛰었다. 이 관찰 놀이는 시나리오 작가 꿈이 사라진 뒤에도 이어졌다.


제주에 살 때는 카페에 앉으면 바다가 보였고, 오름이 보였고, 나무가 보였다. 드물게 보이는 사람에게 굳이 물음표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바다, 오름, 나무만 봐도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으니까. 오랜 사람 관찰 놀이가 막을 내렸다. 이야기를 더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빼는 시간을 즐겼다. 멈추지 않는 생각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생각도 쉬었다.


다시 서울에 왔다. 카페 창가에 앉았다. 이제는 바다도, 오름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 나무가 보이기는 하지만 무리를 이루지 않고 한 두 그루 정도라 시선을 붙들지 못한다. 나무보다는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창가다.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붙인다. 생각을 멈추지는 못하지만 생각에 재미를 더한다. 같은 템포, 같은 궤도를 맴돌던 생각을 변주한다. 다큐멘터리 같은 일상에 스릴러, 액션, 로맨스를 끼워 넣는다.


오늘도 카페 2층의 통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드문 드문 서있는 소나무 가로수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앞뒤 방향도 다르고 걷는 속도도 다르지만 모두 걷고 있다. 흘러가는 속도에 쉼표가 생겼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한 여자가 멈춰 선 것. 세네 걸음 떨어진 소나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소나무 끝을 바라보는 건지, 그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건지는 애매하지만 시선은 위를 향했다. 마주한 햇볕을 손그늘로 가리고 한참을 서 있었다. 모자와 손그늘 너머 내게 보이는 건 입꼬리뿐. 일자로 다물린 입꼬리가 느슨해지며 살짝 끝을 올렸다. 거울처럼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쉼표였던 여자가 다시 음표를 만들며 움직이자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들었다. 솔잎이 느리게 흔들렸다. 바람의 흐름이 보였다. 그 너머 풀어헤쳐진 구름도 꼬리를 늘였다.


쉼표 없는 도시라 생각했던 서울에서 쉼표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다양한 음표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쉼표가 귀했다. 귀하니 더 소중히 느껴줘야지. 사람을 보며 생각을 더하고 고개를 들어 생각을 쉬어야겠다. 비록 제주보다는 곱지 않을지라도 하늘은 하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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