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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안녕 Aug 20. 2020

내가 사랑하는 가장 쎈 맹수

이렇게 귀여운 맹수가 있을 수 있는 걸까

우리 집은 뒷베란다로는 감귤밭이 펼쳐지고 거실 앞으로는 녹음이 푸르른 환경이다.

푸르른 나무의 흔들거리는 소리 속에 새들이 정말 다양하게 오고 봄에는 달큰한 귤꽃 향이, 여름에는 진한 풀잎 향이, 가을에는 청명한 하늘향이, 겨울에는 자연 속 시원한 향이 온다. 

여기에 반해서 이 집을 계약했는데 푸르른 여름이 오면 습한 제주도에 맞게 집의 습도가 높아지고 벌레들이 기승을 부린다. 

사랑하는 주방 감귤밭 뷰
아랑이도 보는 하늘 뷰
거실 나무 뷰

당최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는 자연 속에 살고 있는 각종 벌레들이 창문만 열어놨다 하면 방충망조차도 뚫고 들어오는데 벌레라면 칠렐레 팔렐레 도망가는 나에게는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다. 

그런데 무서워하는 나를 동화 속 왕자님처럼 멋있게 구해주는 귀염 뽀짝 한 맹수가 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 아랑이다.

사람 손길을 너무 좋아하는 아랑이는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무조건 내 무릎 위에 앉아서 고롱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화장실 앞에서 호위 기사처럼 기다려주고, 요리를 하고 있으면 식탁에 앉아서 그윽하게 쳐다봐주고 잠자리에 누우면 정확히 내 오른팔과 몸통 사이에 들어와서 내 팔목을 베개 삼아 함께 누워서 잔다. 

내 눈엔 작은 고양이,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작은 손과 몸통, 무섭지도 않은 쪼꼬만 송곳니라 인형 같기만 한 고양이. 그런데 벌레가 집에 들어오면 바로 돌변한다.

하루는 자려고 누워있는데 모기가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잡자니 귀찮고 그대로 잠들자니 잠들만하면 모기가 귓가에서 맴돌아서 신경이 쓰였다. 잠깐 일어나서 잡으면 될 것을 한참을 그 상태로 버텼는데 발 밑에서 아랑이가 이불도 툭툭 치고 신난 목소리로 냥냥-소리도 내길래 "옳지 아랑이가 모기를 잡았구나" 하고 기특하다 하고 있었다. 죽은 모기를 너무 으깨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결국 불을 켜고 아랑이를 봤는데... 


지네.

머리랑 꼬리가 어마 무시하게 쎄 보이는 빨간색을 가진 족히 15cm는 넘어 보이는 지네.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지네. 


노래기와는 비교도 안되게 강하게 생긴 지네를 아랑이가 툭툭 치면서 놀고 있었다. 벌레라면 학을 떼는 내가 소리를 지른 뒤에 든 생각은 저 지네가 아랑이를 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것뿐이었다. 

뒤늦게 이게 엄마맘일까 생각했다.

무섭고 말고를 떠나서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두툼하게 뜯어와서 과감하게 지네를 잡았고 변기로 달려가서 넣고 물을 내렸다. 그게 맹수 아랑이의 사냥을 제대로 본 첫날이었다.

아랑이는 가지고 놀던 지네가 사라지니 나에게 긴 소리로 냐~~~~ 하고 재촉을 했고 곳곳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나는 내가 아랑이를 구해줬다고 생각했지, 사냥감을 뺏었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 뒤로도 가끔 지네, 노래기, 큰 나방, 무당벌레, 무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딱딱 소리를 내는 벌레 등등을 마주친다. 익숙해질 상황인데도 소름 끼치게 싫고 잡으면서도 으으으 소리를 내면서 잡는데 그때마다 아랑이가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다. 


재밌는 건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서 벌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는 아주 쉬워졌다.

평소라면 아랑이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현관문 앞에 앉아있는 편인데 벌레 사냥을 하고 있을 때는 내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벌레만 바라보고 있다.

처음엔 내가 아랑이를 구조했다고 생각했던 지네와의 첫 만남이, 지금은 지네가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고 아랑이는 주시하다가 한 방씩 펀치를 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랑이 맹수다! 하며 내가 지네를 잡는 게 지네를 구조해주는 느낌이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맹수라니. 

벌레들한테는 사나운 맹수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다니.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센 맹수는 아랑이다. 그리고 그 맹수는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든든한 일이 있을까.


손가락을 내밀면 코로 톡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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