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커피

Cafe latte

by 이단단

사람이 가장 무방비해지는 시간에 대하여.


아기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 위로 기울어진 오후 세시의 햇살을 본 적 있는지. 그때의 볕뉘는 나긋나긋하게 한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지닌 다정한 사람 같다.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해지고 진실해질 때는 잠이 들었을 때가 아닐는지. 나는 특히 엄마의 잠든 모습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누구보다 가깝고 또 가까워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엄마의 잠든 모습을 보며 밤사이 불안에 떨었던 적이 있었다. 인간의 시간이 마치 잠을 자고 난 이후에 탄생의 반대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 같아서 그랬다. 언젠가 다 기울어지고 나면 끝이 나 있을까 봐 또래보다 조금 더 일찍 불안해했던 것 같다.


여느 모녀가 다 그렇듯, 우리는 언제나 사소한 일로 다퉜다. 아버지가 오래 계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여사의 남편으로, 혹은 큰 딸로 , 친구로 지내왔다. (모두 다 틀렸다..) 그래서 그런지 또래 여자애들보다 엄마와 싸운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게 옥신각신에서 어떤 날은 대판 싸우고 나면 , 엄마는 항상 울고불고 난리 쳤던 나보다 먼저 지쳐 한두 시간씩 꼭 낮잠을 잤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밀크 커피를 타주었다. 엄마 피셜 ‘밀커피’라는 것을. 내가 태어났을 무렵 사두었던, 어린 시절부터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빨강과 노랑이 섞인 알록달록한 주전자가 떠오른다. 그 주전자에 아무리 싸워도 딸을 사랑한다는. 달고 고소한 맛이 나는 우유를 넣고 미안함과 애석함을 한데 넣어 휘휘 젓는다. 그리고 적정온도가 되면 그래도 ‘너도 나중에 너같은 딸년 낳아봐 그래.’라고 말하는 듯한 쌉싸름한 알갱이 커피를 몇 알을 타고 몇 분간 기다리면 그게 엄마의 밀커피가 됐다. 밀크커피를 마음대로 줄여버린 엄마의 제멋대로 창작센스는 다른 곳에서도 종종 발휘되었다.


그 뒤로도 밀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괜히 미안한 마음 반,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반, 반반씩 섞인 애증의 마음을 엄마에게 풀곤 했고, 또 지쳐 잠든 엄마의 얼굴 위로 기울어져 떨어지는 볕뉘를 보며 마음을 달래고 또 혼자 설렜던 기억이 있다.


햇살에도 따스한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로. 당연하게 처음부터 엄마였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에게도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혼자 마음이 놓이고는 했다. 그래서 그 뒤로 카페라테를 보면, 엄마에게 이유 모를 짜증을 내고 전화를 끊고 나면 엄마의 밀커피가 입 안에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