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플랫화이트 (Long black, Flat white)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한두 잔씩 시도하다가 보니 커피 내리기는 기복이 심한 내가 유일하게 정착한 취미가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집에서 사용하기에 적당한 용량의 커피머신과 원두를 찾아 수동 그라인더에 넣고 핸들을 천천히 돌린다.
그러고 나서 머신의 물탱크에 차가운 물을 붓고 원두를 기계에 탬핑하여 커피를 추출한다. 잔에 따라 다르지만, 1분에서 2분 정도 기다리면 진한 초콜릿색의 커피가 눈앞에서 작은 폭포수가 되어 내려온다. 차가운 물은 그렇게 원두와 함께, 눈앞에서 때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검은 심연이 되어서 내려온다.
깊어가는 취미활동인 만큼, 원두를 고르는 일도 재미를 붙여간다. 어떨 때는 고소한 풍미가 원두를 고르기도 하고, 한 번씩 온몸이 짜릿할 만큼 나에게 강렬한 산미가 느껴지는 것들을 골라가며 마시는 일은 꼭 타로점을 쳐보는 것 같기도 해서 재미있다. 적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에게 커피 마시기란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가려보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마셔보고 싶은 원두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 지도.
커피를 좋아하는 만큼 잠을 자는 일이 줄어버렸으니, 다음 날 할 일을 위해서 아침 일찍 마셔야 한다. 그러려면 조금 더 부지런히 일어나야 한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좀 더 부지런하거나 중독에 취약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둘 다 카페인에 약한 사람들이라면 일찍 일어나 마시고 밤에 잠드는 사람과 잠을 못 자서 피곤해.라는 말을 입 밖에 달고 살면서도 늦은 밤에 침대 위에 앉아 먹고 싶은 커피를 홀짝여야 하는 사람으로.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커피를 밤에 마시면 검은 밤에게 잡아먹혀 한껏 외로워지는 시간을 한 조각씩 깨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커피와 사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 늘 혼자일 수는 없다. 아무리 혼자인 삶을 추구하는 극 내향적인 사람이라지만 혼자서 잘 지내다가도 한 번쯤 보고 싶어 죽겠다. 싶은 사람이 살아가며 생기기 마련이었다. 혼자가 좋은데 혼자가 싫다는 말에 나는 적극 동감하는 사람이라 원래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의 온기나 사람의 말소리가 그리워지는 순간은 찾아와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다.
하루 8시간 이상을 직장동료들과 같이 있다 보면 자연히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겨워지고 그들을 이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넘쳐 흘러와 머리가 아프다. 심하면 스위치를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것도 퇴사를 하니 너무 오랫동안 꺼버리는 바람에 일상까지 녹이 슬뻔했다.
퇴사를 하고 난 뒤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없어지자, 신경증으로 아파왔던 몸은 나아졌지만 내 안의 감정과 언어들은 바닥을 보일만큼 단조로워졌다. 기능할 수 있는 것들이란 죄다 녹슬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이면 썩고 멈추면 녹이 슨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번에 체감했다. 몸이든 정신이든 기계든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깥에 대한 관심도 물론이고 심할 경우 나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져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카페에 갔다. 여전한 covid-19 때문에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사람을 만나러 가지만 딱히 섞이고 싶지 않을 때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사람 사이에 섞이는 것도 아니고 안 섞인 것도 아닌 불명확한 상태를 즐기면서 커피를 마신다.
최근에도 녹이 슬었는지, 사람이 그리웠다.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엔. 만나는 것은 더 어려워졌는데 카톡으로 연락하는 것은 여전히 쉬웠다. 서로 톡을 주고받다가 이럴 거면 그냥 만납시다. 해서 새로 생긴 카페에 가서 ‘j’ 언니와 수다를 떨었다. 어려운 사람이 아닌지, 나라는 사람이 여전히 그 사람에게 가로막힌 기분이 드는 사람이 아닌지 잠깐 고민했지만 금세 그런 고민을 잊을 만큼 대화는 일상적이었고, 뜨거웠다.
사회적 이슈인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듣게 됐다. 그러면서 서로 각자 좋아하는 커피를 추천하여 마셨는데, 꼭 그 행위가 서로서로 마음을 나눠 마시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혼자 있을 때는 덩그러니 나만의 검은 심연을 먹는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는데, 누군가와 함께 커피를 나눠 마시면 마음이 자라나는 듯한 개운한 느낌이 든다.
제 발로 사람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사람도 있다니, 그게 나라니. 사람이 꺼려진다면서도 사람이 보고 싶다니. 글을 쓰면서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놀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게 나라는 인간임을 인정해야겠다. 고독해지는 마음을 이기고 싶을 때만 찾는다고 괘씸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 기분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나라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 것만 같다. 앞으로도 사람이 그리워지는 날에 사람과 함께 있는 카페에 가거나, 카페에서 각자 좋아하는 두 잔의 커피를 시켜 나눠 마셔야지. 그런 커피는 절대로 식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