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와 겨울, 새벽 뱅쇼.

뱅쇼(vin chaud)

by 이단단

뱅쇼.

이번 겨울은 작업하면서 뱅쇼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와인에 향이 좋은 시나몬과 꽃잎 같은 재료를 넣고 뜨거운 물에 끓여주면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따뜻하고 상큼한 음료가 만들어진다. 뜨끈한 잔에 방금 만들어진 뱅쇼는 새로 만난 사람들과 생기는 열정과 설렘 같은 감정과 많이 닮았다.


이제 따뜻한 음료를 찾는 걸 보니 제법 신체의 열기가 전보다 떨어지는 모양. 아니면 스무 살 초겨울 때보다 이십 대 후반에 맞는 겨울의 차가움은 살짝 두렵기 때문인가.

올해 겨울은 작년에 비하면 매우 이상한 느낌이다. 언제 한번 털재킷에 목도리를 목에 감고 나갔는데, 덥다고 느꼈다. 초봄의 느낌이 살짝 났다. 올해 겨울은 이상하게 땀도 많이 나고. 귓가에 크리스마스 캐럴도 자주 들린다.


작년에 서울에서 처음 맞은 겨울바람이 너무 혹독했나,

왠지 이번 겨울은 견딜만하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겨울은, 무조건 혹독해야 하나?

온기가 가실 줄 모르는 뱅쇼를 두 손 모아 쥐고 깊은 밤 생각한다.


어딘가에는 분명 따뜻한 겨울도 있지 않을까.


겨울은 당연하게 추울 거라는, 차가워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보다 몇억 년 먼저 태어난 지구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아마존땅이 고대에는 사막이었고, 사막이 한때는 물과 나무가 가득했다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어쩌면 반대이겠구나. 생각했다.


올해 딱 한 달만 따뜻한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추우면 추운 대로. 눈이 내리는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겨울나기가 수월해진다면 좋겠다.

따뜻해서, 너무나 따뜻한 겨울이어서.

하루만 더 살아내기를. 살아지기를.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최승호 <눈사람 자살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