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화 사놓고 걷는 사람

06 걷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by 이단단

새해에는 달리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하루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잘 팔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새 다이어리를 받아 들고선 2024년 목표. 01번. 달리기.라고 슥슥 써본다. 인스타 무물에다가 적당한 운동화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했다.


적당해 보이는 브랜드 추천을 받곤 할인매장에 마침 비슷한 운동화를 판매하기에 구매했다. 적당한 러닝화였다. 적당히 무채색이고 적당히 쿠션감이 있고 적당히 지면에 닿는 밑창의 곡선이 적당하게 진, 그런 적당한 러닝화. 그리곤 달리기 어플을 깔았다.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니, 애플워치와 연동해서 내가 있는 곳부터, 청계광장까지를 최종 목적지로 설정했다. 일단 다 못가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보자고. 완주하기가 힘들 것 같으면 걸어서 가자고 계획했었다. 날씨가 잠깐 청명했던 오전에, 굳은 결심을 하고 가벼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나는 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허리가 좋지 않다. 재작년 겨울, 건강검진을 하다가 척추 디스크가 탈출하기 전단계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동에서 일했을 때,엄청 무거운 환자를 수술실에 보내기 위해 이송용 침대로 들어 올리던 순간 뭔가가 삐끗하는 느낌이 들었고, 며칠 지나자 뭉근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다리도 저렸다.


게다가 지구력도 약한 편이다. 연차가 늘어감에 따라 감사하게도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늘었고, 퇴근하고 잠깐 걷고 카페에 들어가 글을 쓸 때도 앉아만 있으니 다리 근육은 점점 사라져 갔다. (대학생 때는 학교와 집 왕복 한 시간을 걸어 다녔다.) 허리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불규칙한 식사와 수면패턴, 운동부족으로 인한 체중증가 등.. 다른 문제도 많았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달리기를 시작해서 습관으로 만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어쩌면 나보다 더 심한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자기객관화로 포장한 포기가 빠른 편. 달리기 전에 먼저 걷기부터 제대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잠깐 뛰어봤지만, 갑자기 늘어난 신체운동은 머리를 백색 도화지로 만들고, 코와 목은 가장 매운 청양 고춧가루를 열 통이나 부어댄 것처럼 따가웠다. 그 후로 달리는 것도 기본적으로 코어가 잡혀있는 사람들이나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인가. 달리기란 생각보다 더욱 더 기본 체력을 요구하는 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날 달리기를 실패하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상심과 분노였다. ‘모두가 뛰고 있는데, 나는 왜 걷고 있나.’ 에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커리어도 달리기도 뒤처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연차만 채우고 있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촌들의 성공소식은 나를 기죽였다. 다양한 곳애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표현은 다 못하지만 나에게 할 말이 가득해 보이는 엄마의 한숨소리를 듣는 날이면 더욱더 심란했다. 나는 뭘 하고 있지?하고 싶은 건 많으면서,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들 하는데, 그 말을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으로 일렁거리던 마음들이 청계천의 물줄기들과 함께 따라 흘렀다. 숨 쉬는 중, 자는 중. 나 지금 뭐 먹는 중, 이런 동사를 말한 건 아닐거 아냐? 그렇지 않아도 하루를 보내기에도 아직 벅찬데 또 뭘하란 거야?! 아, 진짜로 뭘 하면 좋은걸까 뭐가 좋은 걸까. 정말. 직접뛰는 것마저 안되니까 화가 많이 났던 것 같다. 그날, 청계천 주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흘러가는 물줄기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조금만 뛰어도 심하게 헉헉대는 몸과. 그날따라 딱딱하게 느껴지던 시멘트가 어찌나 원망스럽던지.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족했던 것은 신체 코어(도 없긴 하지만)보다 코어 '마인드'가 부족했던 것이었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끝내긴 싫었다. 달리기를 못하면 걸으면 되지 뭐. 무엇보다 새 신발을 걷고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뒤로 나는 '러닝화신고 걷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너나 할 것 없이 천변을 뛰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갈 때면, 살짝 머쓱해지기도 하지만 그들은 이미 눈앞에 목적지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한 점에 시선이 박혀 있었고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자신감을 얻고선 툭하면 러닝화를 신고 걷는다.

지금은 하루에 오천 보 이상부터 시작하여 만보 걷기를 하고 있다. 부족하면 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다가 간다. 걷기 전에는 서울을 잘 몰라서 가까운 거리도 지하철로 가곤 했는데, (그땐 지방에서 막 올라와서, 서울에서 이동하려면 반드시 지하철 타야 하는 줄 알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서울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도시였다.


조금 느리게 가면 어때, 달리지 못하는 대신에 나는 달리는 사람들보다 조금 더 먼 코스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허리가 좋지 않을 땐 앉거나 눕기보다 서있거나 걷는 연습을 하면 좋다. 자세교정을 배웠을 때 코치가 늘 강조하는 말이 허리로 가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하체의 힘을 기르는 게 좋고, 가장 쉬운 방법이 걷기라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게 기억난다. 달리기도 조금 더 빠르고 멀리 나아갈 수 있는 힘, 모든 복잡한 감정을 리셋시키는 힘도 가지고 있지만, 일단 오늘의 나는 바르게 서서 제대로 걷는 연습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달리지 않을까. 걷다가 예쁜 가게나 카페가 있으면 놀러가야지.

날씨 변화나 몸이 아프 거나 변수는 늘 있겠지만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보자.

매일 목표는 집부터 다른 동네가 보일 때까지다. 걷다가 사계절의 변화를 더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면 더욱 좋겠다. 혹시 몰라, 누군가 지켜보지 않을 아주 사소한 것들을 큰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될 지도.

허리가 아파서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의 ㅍ도 못하는 처지지만 단단히 걸어보자고 노래를 부르는 일도 좋은 것 같다. 나는 나만의 속도대로 가는거야!






< 산책할 때, 하고 싶을 때 좋은 도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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