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낸 가장 긴 밤

17 나의 사려 깊은 친구

by 이단단

요즘은 어떠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긴 말을 뱉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저 그래.”라는 말을 내뱉는다. 막상 말하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물어보기만 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내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얼버무리고 난처한 마음이 된다. 물어봐주는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그 사람이 너무 좋아지고 간절해져서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 수가 없어진다.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쓰느라 정작 나의 상태를 잊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얼른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K를 만났고 그 사람은 나보다 말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웃기게도 어색한 침묵은 또 참지 못하는 나로서 수다쟁이가 되게 만드는 사람. 굳이 나에게 할 말이 없다고 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너에게 양보한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 자존심을 거두고 천천히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해도 괜찮아.라고 하는 배려마저 침묵으로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저 그래.”라고 말을 얼버무릴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꼭 내 대답을 지그시 응시하곤 했다. “이불에서 뒹굴다 왔어.” “요즘 글 안 쓰고 놀기만 해. 영화만 보고. 한심하지?”라고 해도 절대 한심하게 나를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 그 어떤 충고도 , 그 어떤 감상도 없이 가만히 듣다가 내가 쓴 글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럼 그때 이 글을 쓴 거네.” 라며 무심히 툭 던져주던 사람. 간결하지만 모든 나의 상태를 맞추던 사람.


사람들은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그를 둔하다고 평가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감정이라는 칼을 다룰 줄 아는 가장 섬세한 사람이었다. 출근 전 누군가와 대판 싸우고 이 글을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마음이 찌르르하다. 나의 이야기를 기다려줬으면 좋겠는데. ‘오호라 얘가 오늘 또 무슨 사고를 쳤구나.’ 하면서 퍼즐을 맞춰가지는 않았음 하는데.


“석원이는 요즘 글은 안 쓰고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본대”라고 할 때 넌 “그럼 나머지 시간에 글을 쓰는 거야?”라고 물어봐준 사람이었는데. 그런 네가 둔하다니 그럴 리는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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