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홍차>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 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들을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신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 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힌디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빰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 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까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에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기억하겠지 당신 몸에 난 흉터를 만지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냈다는 것
노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 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뿐
그러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
“꽃이 오고 봄이 핀다.”
여러가지 단어가 연상되는 계절이 있다. 가령 3월의 꽃과 5월의 만개, 7월의 눅진함과 겨울을 앞둔 11월의 서늘함.
봄이 되었을 때 문득 했던 생각이 있다. 봄이 오고 꽃이 핀다기보단 꽃이 오고 봄이 핀다는 표현이 적확하지 않나 하는 생각. 우리는 꽃이 핀 것을 보고 봄이 왔음을 확신한다. 꽃이 피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계절을 감히 봄이라 칭할 수 있을까? 봄이라는 개념보다 꽃이라는 현상이 앞서는, 그런 때가 있다. 개념보다 상징과 현상이 앞서는 그런 순간.
나에게 사랑은 늘 그러했다. 사랑임을 깨닫기 전에 늘 불안이 앞섰다. 그러니 불안이라는 현상은 내게 있어 사랑이라는 개념의 상징인 셈이다. 이게 사랑이면 어떡하지 불안해지면 그 불안으로 인해 더 불안해졌고, 사랑이 끝나고서야 그 불안이 사랑의 반증이었음을 증명받았다.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 조각 넣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길 선호했다. 이 사랑으로 인해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남지 않길 바랐으므로. 그러니 홍차를 다 마시고 난 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이 마침내 끝나버린 뒤, 각자에게 남은 것도 달랐겠지. 당신에겐 당신 자신이 예상할 수 있었던 딱 레몬 한 조각만큼의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길 바랐던 나에겐 기어코 봄의 꽃잎 한장 같은 예쁜 미련이 내려앉고 말았을 것이다.
꽃잎은 시간이 들수록 오그라들고 말라 비틀어지기 마련이니, 딱 꽃잎 한 장만큼의 미련을 마주한 나는, 꽃잎이 오그라들듯 한때 예뻤던 미련마저 못생기게 오그라들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봄은 지나갈 수밖에 없다’ 깨닫게 되겠지. 사랑을 넘어 미련을 남기고, 미련이 원망으로 변해가는 순간을 지켜보며, 그렇게 다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정하게 되겠지.
계절을 돌고 돌아 그때의 꽃잎과 지금의 꽃잎은 같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 빛깔과 촉감과 잎맥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말하자면 그때의 봄과 지금의 봄은 같을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가 돼서야 나는 봄을 되찾길 포기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