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울역 Jan 07. 2019

서울역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서울역과의 질긴 인연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 때와 달라진 게 너무 많은데, 서울역은 왜 그대로일까.


대학시절 내내 오가던 서울역은 그저 환승을 하기 위한 곳이었다.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늘 발걸음을 재촉했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복잡하고, 북적거리며, 깨끗하지 않았다.

왕복 4시간에 육박하는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며 4년 내내 학교를 다녔다. 서울역을 기점으로 바삐 지나 다니는 빨간 광역버스는 4년 내내 나의 통학 길을 꽤 수월하게 만들어줬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 정신 없이 자다 눈을 뜨면 어느새 자리가 없어 빼곡하게 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한남대교가 보였고, 다시 비몽사몽 자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한가해져있는 버스는 경복궁과 세종문화회관을 지나 종점인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에 멈췄다. 서울역에서 내려 4호선 지하철역까지의 기나긴 길을 따라 바삐 걷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에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LED 전광판이 수놓은 서울스퀘어 건물을 바라보면서 버스환승센터 앞 북적북적 모인 사람들 틈에 껴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빨간 버스는 대부분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그 때는 긴 시간을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첫 3년은 서울역에 갈 일이 통 없었다. 가끔 KTX를 타러 갈 때 빼고는. 그러다 회사가 사무실 위치를 이전하게 되며 다시 서울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것도 매일같이 오고 가던 서울역 버스환승센터 바로 앞, 매일 버스를 기다리며 구경하던 전광판이 있는 건물인 서울스퀘어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게, 어떻게 보면 너무 신기하고 익숙하기도 하고, 반가웠다.

매일이긴 해도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서울역에서 아예 근무를 하며 하루 8시간 이상을 머물다 보니, 생각한 것보다 생활 환경이 꽤 효율적으로 변했다. 퇴근 후 서울역에서 바로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도 있고, 공항철도를 타고 30분 만에 바로 공항에 갈 수도 있고, 점심시간 서울역 롯데아울렛이나 자라에서 쇼핑을 할 수도 있다. 주로 업무 미팅을 하는 광화문, 을지로도 모두 다 근방이라 낮 시간을 훨씬 쪼개서 쓸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남산이 가깝다는 거다. 남산공원은 자동차, 버스, 택시가 북적거리는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역 앞과는 다른 세상이다. 서울스퀘어 뒷편 힐튼호텔을 지나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남산 공원은 복잡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아이러니한 곳이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온 몸으로, 수시로 느끼면서 왠지 모를 감사함을 느꼈다.



서울역 중앙이 정면으로 보이는 사무실에서는, 오후 5시 정도부터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며 어둑해지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즐거운 일이다. 그라데이션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과 서울역을 중심으로 양쪽에 높고 낮게 펼쳐진 건물들의 윤곽이 근사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데 서울역 밖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차분함, 고요함 같은 게 느껴진다. 유리창 밖으로만 보이는 왜곡된 풍경 같기도 하다.



버스 환승센터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몇 년 전 같은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때를 종종 회상한다. ‘집에 가서 저녁 뭐 먹지’, ‘9시 필라테스 수업 가야지’ 같은 의식주와 직결된 생각 뿐인 지금보다, 그 때는 더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 때는 집에 가는 길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새로 지어진 서울로테라스 건물이나, 서울로 7017 산책로, 핫플레이스가 가득한 서울역 뒷편 만리동 골목 같은 곳을 다녀온 뒤 남은 잔상은 몇 년 전 내가 서울역을 오가며 느끼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 되기도 했다. 날씨가 따스한 초여름 점심에는 서울로 7017 한복판에 펼쳐진 간이 쇼파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고, 중간 중간 세워진 피아노마다 저마다의 연주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서울역 롯데마트는 중국인 전용 계산대가 따로 있을 정도로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다. 시대가 변해가면서 서울역의 풍경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서울로 7017
만리동


하지만 여전히,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모습은 그대로다. 이른 새벽이나 저녁이 되면 바닥에 줄지어 자리를 깔기 시작하는 노숙자들이나, 가기 싫은 공중 화장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어깨가 닿기 싫은 느낌, 왠지 모르게 오래 머물기 싫은 느낌 같은 것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서울역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 성인이 되고,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니고, 여행을 떠나고. 내 모습이 변하는 시점에, 또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 늘 서울역이 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날들 가운데에도 서울역이 중심이었고, 일상에서 벗어나 떠나는 여행에서도 서울역이 출발지가 됐다. 서울역과의 질긴 인연이 신기하고, 정감가고, 서울역에게 고맙다. 5년 뒤, 10년 뒤 나와 서울역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이전 05화 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살을 빼는 겁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