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따스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아이들은 생과일을 갈아 만든
과일 주스를 즐겨 마십니다.
그런데 나는 프리마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봉지커피를 사랑합니다.
쓰디쓴 인생살이 속에서 입안에 단내가 돌 때,
나는 습관처럼 컵을 뽑아 따뜻한 물을 받고,
샛노란 맥심모카골드 커피믹스의 초록색 부분을 찢어, 커피 분말과 설탕을 종이컵에 탈탈 털어 넣습니다.
옆에 깨끗한 찻숟가락이 놓여 있는데도,
나는 굳이 비어 있는 커피 비닐봉지로
휘휘 생각 없이 여러 번 젓고 또 젓습니다.
조금 식은 커피를 입술에 살짝 대면,
혀를 톡 쏘는 쌉싸름함,
입천장을 부드럽게 감싸는 프리마의 풍미,
목구멍을 간질이며 스며드는 설탕의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 퍼집니다.
봉지커피는 입속을 한 바퀴 맴돌다가
목구멍 너머로 스르르 사라집니다.
순간, 첫사랑 자야를 다시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러나 이내,
후욱 찬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갑니다.
가끔 나는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저 봉지커피와 참으로 닮았다.
쓰면서도 달고,
자극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와 너무 짙지 않은 색깔을 품은...
참 오묘하고, 정말 신비롭고,
흔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적으며 : 오래 전에 적었던 글을 끄집어 내어 다듬는데, 손을 댈수록 생채기만 납니다.
수년 전, '당뇨와 혈압 수치가 높다'는 아내의 권유로 그렇게 사랑하던 봉지커피를 끊었습니다.
하지만 몰래 만나는 연인처럼, 은밀한 봉지커피 사랑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들은 커피 도구와 원두를 사서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줍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되었고, 바리스타 학원에서 자격증도 따고, 이제는 직접 원두를 고르기도 합니다.
새벽, 아내와 나란히 누워 유튜브에서 노고지리의 '찻잔'을 찾아 듣습니다.
그러다가 아내는 일어나서는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커피 두 잔을 창가로 가져옵니다.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내는 따스한 아메리카노!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 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우리는 함께 갈라진 목소리로 노래를 합창하다가, 잠깐 눈이 마주치고 맙니다.
토닥, 토닥...
루루루...
"미안해, 평생 고생시켜서."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사랑해,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아침이면 출근을 하는데, 퇴직을 한 후 전에 근무하던 직장에서 봉사로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봉지커피 한 통을 사서 사무실에 두고,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십니다. 그리고 방문하시는 내담자에게 가끔 권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건네는 사연들은 때로는 쓰디쓴 에스프레소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달콤한 설탕을 한 스푼 넣고, 부드러운 프리마(커피크림)를 더하고, 묽어지게 물을 더 부어 그들의 턱 끝에 찬 숨을 쉴 작은 공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들풀의책쓰기 #들풀시 #들풀사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