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아로 May 17. 2023

계획적 속도 위반,
"아이부터 갖고, 결혼하자."

 

마흔 살인 남자친구와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아이를 갖기에 나이가 너무 많아져버린 '고연령군'에 속했다. 남자도 나이를 먹으면 정자의 수도 줄어들 뿐 아니라 운동성도 떨어지고, 여자도 나이를 먹으면 건강한 난소 배출이 어려워져 자연임신의 확률이 낮아진다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주변에서 난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면서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첫 만남이 결혼을 목적으로 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연애를 시작하면서 '같이 늙어가면 즐거울 거 같은 사람, 동반자'로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도 같은 마음. 그러나 남자친구는 현실적으로 결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우리집 상황이 아니라 아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 설명하자면)


1. 80세가 넘으신 연로하신 부모님, 노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신 상태였고 일을 그만 두신지도 10여년이 넘음. 

2. 미혼 상태의 누나가 2명. 같이 거주하고 있는 상태. (큰 누나 40대 중반, 작은 누나 40대 초반)

3. 큰 누나가 고등학교만 졸업한 후 공무원 시험 약 15년 정도 준비 (그 후에는 부모님께서 편찮으셔서 가끔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집안 살림을 거들었다고 함.) 그 후 집에서 어머니와 살림만 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취업을 한 적이 없음. 고정 수입을 벌은 적이 없음.

4. 살림을 돕는 큰 누나가 막내 동생(남자친구)에게 생활비로 한달에 200만원씩 내라고 했다고 함.

5. 남자친구는 큰 누나 말대로 생활비를 한 달에 200만원씩 줌. (그 전에 열정페이 받던 시절에는 그 정도의 수입이 없어서 200만원은 아니지만 늘, 자기 수입의 80~90%를 생활비로 보탰다고 함.)

6.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을 위해 모아 놓은 자금이 없음.

7. 생활비를 끊고 자신을 위해 돈을 모을 수가 없음. (작은 누나가 내는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지금보다 빠듯해질테니) 아니, 큰누나가 일을 구하기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그에 대한 신뢰가 없어 결혼준비를 하겠다면서 생활비 드리는 걸 끊을 수 없다고 남자친구가 판단함.


이것이 우리가 결혼하기 어려운 최대의 난점이었다. 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집 형편이 어려운데도 큰 누나가 15년이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어?"

"일을 한번도 안 한 큰 누나가, 생활비 200만원 내라는 말을 당연한걸 요구하듯이 오빠한테 말했어? 200만원의 기준은 어디서 비롯된 건데? 왜 그렇게 줘야하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내라는 대로 낸 거야?"

"왜 근데 큰 누나는 일 안한데? 요즘은 알바해도 최저 임금이 올라서 150만원 이상은 벌텐데."


나는

대학교 다니면서 과외하고 알바하면서 내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했고

대학원 다니면서 조교하고 과외하며 학비 및 생활비를 벌었으며

취업한 후로는 나의 독립된 생활을 해나갔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점 투성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부모님 노후도 걱정없었고, 이래저래 가정 형편도 상대적으로 나은 편인데...

무엇보다도 성인으로서, 스스로를 위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만들어 가야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싶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남자친구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죽을때까지 동생들이 큰 누나의 삶을 책임져 줄 수 있는게 아니니까... 근데 일 구하고 있냐는 질문을 큰누나에게 해도, 큰 누나가 짜증만 내고 일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무언가 배우고 자격증도 따고 하면서 하려고는 하는데 잘 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 

세상에... 대학을 나오고 어리고, 가르치면서 일 시킬 수 있는 인력이 널리고 널렸는데, 40대 중반에 무경력자를 어느 회사에서 뽑고 싶겠는가... 40대 중반이면 일반 회사의 과장, 차장급인데... 신입으로 과장, 차장 나이를 뽑아서 쓰려고 하겠는가... 오 마이 갓!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인데(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 세상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큰 누나'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점들 투성이었다. 여하튼 이런 저런 이유로 생활비를 끊을 수가 없어 결혼이 어렵다는 것이 결론. 사실 이런 문제로 40살이 될 때까지 이 남자는 '결혼'자체를 인생에서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30대 초반에 사귀던 여자친구들 중,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여자도 있었지만,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던 남자친구는 상대방에게 이별을 통보했었다고 한다. 

 나는 학벌, 집안 등의 조건을 포기할 수 없어 결혼정보회사까지 가입했던 사람이었지만, 남자친구의 인성과 나를 사랑해주는 마음,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 가정적이고 따뜻한 아빠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외부적인 조건들(학벌, 집안, 돈 등)을 모두 포기하고 사람 하나만 보고, 현재 아무 것도 없지만 같이 상대방의 부족한 조건들은 같이 채워보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우리 둘은, 우리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그동안 그 남자친구 집에 생활비를 드렸던 것을 끊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아무런 명분 없이 생활비를 끊기 힘들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명분을 만들기로 했고, 그에 대한 명분으로 '임신'을 선택했다. 아이를 둘 다 원하는 고연령자로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우리는 '계획적인 속도 위반'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