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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Jun 17. 2019

사람이 빛나는 순간

여행 중 만난 사람 1

여행 중 스쳐갔던 많은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인간이 이럴 때 멋있어지는구나를 알게 해 준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인간이 이럴 때 정나미가 떨어지는구나를 알게 해 준 사람이다.


두 가지 부류의 사람 모두 평상시에는 그 멋짐과 추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인내심과 배려심이 바닥나는 힘든 상황을 마주하면 여지없이 그 본모습을 드러낸다.


이름도 모르고 국적도 모르는 그 멋진 분을 만난 건 약 40명의 인파가 비행기를 놓쳐 집단 패닉에 빠져 있을 때였다. 포르투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가 두 시간 이상 연착되며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짙은 안개로 인한 지연으로 보였는데 항공사 측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일축했다.) 마드리드를 경유해 다른 도시로 이동 예정이었던 우리 가족과 마흔 명 남짓의 사람들은 그렇게 다음 비행기를 놓치고 한 밤중에 갈 곳을 잃은 채 마드리드 공항에 남겨졌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항공사 데스크로 달려가니 이미 그곳엔 분노에 찬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항공사 데스크에는 단 두 명의 직원만 남아 응대를 해 주다 보니 대기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분노와 불안의 검은 기운을 숨 막히게 뿜어 내던 사람들은 새벽 1시가 다 돼서 항공사에서 제공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스트레스와 피로에 시달리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호텔로 들어섰는데, 웬걸...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호텔 체크인을 하기 위한 대기줄이 또 길게 늘어선다.


공항에서야 유아 동반자에 대한 fast track이 있어 대기줄이 길 때마다 혜택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호텔은 상황이 달랐다. 아가를 앞으로 매고 맨 뒷 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혹시나 누가 먼저 하라고 얘기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잠깐 했지만, 역시나 이렇게 멘탈이 탈탈 털린 상황 속에 남아 있는 배려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피로하고, 배고프고, 짜증 나고 힘든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도 별 기대 없이 무리에 섞여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다 내 차례가 가시권 안에 들어올 즈음이었다. 앞쪽에 있던 안경 낀 남자분이 뒤를 돌아보더니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 와서 먼저 하세요."


ㅜㅜ....


와, 사람한테 후광이 비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분의 배려는 배려 그 이상이었다.


그날 밤 갈 곳을 잃고 단체 패닉에 빠졌던 무리들 가운데는 정장을 멋지게 빼 입고 출장 중인 잘생긴 외국인도 있었고, 젊은 관광객들과 연인, 아줌마, 아저씨도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국적과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나에게는 딱 두 종류의 인간만이 보였다.


자신도 힘든 상황 속에 아기 맨 여자와 매달려 있는 아기를 배려할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 많은 사람 중 첫 번째 부류에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처음 공항에서 봤을 때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정장 입은 외국인은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정말 멋있게 만드는 것은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배려심,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음을 가슴 깊이 배웠다.


그 날밤 심신이 지쳐있던 내게 빛이 되어준 그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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