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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ug 23. 2019

어디에서 뭘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행 중 만난 사람 2

할머니 눈 빛이 자상해요.


큰 아이가 동생들을 돌보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섯 살 아이의 표현이라기에는 너무 예쁘고 그런 걸 관찰하고 알아챌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게 기특했다. 아가들을 바라보는 할머니 눈 빛이 큰 아이의 눈에도 자상하고 부드러워 보이긴 했나 보다. 이 얘기를 듣고 나도 마음속으로 작은 다짐을 했다. 나도 눈 빛이 자상한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의 아이도 자상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말이다.


지난 여행 중 만난 사람 가운데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사람은 세비야에서 만난 스페인 아줌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비야 얼굴에 먹칠한 눈빛이 표독스러운 아줌마라고 할까...


그날 밤을 떠올리니 다시 가슴이 벌렁벌렁 거려지려 한다.


우리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플라멩코 축제인 Feria de abril 기간에 맞춰 세비야에 도착했다. 플라멩코를 좋아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도 없지 않지만, 부모님께도 이 축제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 잡은 일정이었다. (세비야만 들르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이베리아 반도 북부만 구경하며 여행 경비를 많이 절감했을 것이다.)


세비야에서의 첫날, 우리는 겁도 없이 아가들을 매고 축제장까지 2.2km를 행군했다. 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곳곳에 보이는 화려한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매우 들떠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꽤 오랜 시간 플라멩코 춤을 배웠던 레알 flamenco lover였기 때문이었다. 플라멩코로 인해 울고 웃었던 세월이 길었기에 세비야에서 축제를 보러 가는 나의 발걸음이 설렐 만도 했다.

행사장 규모는 정말 엄청났다. 술을 마시며 플라멩코 춤을 즐길 수 있는 작은 부스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고 어마어마한 인파가 붐볐는데 정작 축제장 입구에 들어선 우리는 오는 길에 힘을 다 써 지쳐있었다.

여기저기 흥겨운 음악 소리가 퍼지고 술을 마시며 춤추는 사람들로 축제의 분위기는 달아올라있었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피곤하고 배고픈 이방인...


피로에 지친 부모님은 어디 들어가서 뭐 하나 먹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소란스러운 축제장 입구를 지나 아가들과 부모님이 들어가도 괜찮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니다 보니 안쪽에 규모가 크고 조용한 부스가 보였다. 드디어 들어갈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들어가려 하는데,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이 무서운 얼굴로 나를 가로막는다.


"이곳은 회원 전용이에요."


순간 이 축제는 우릴 위한 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생각지 못한 출입 거부에 우리는 시무룩해져 발길을 돌렸다. 세비야는 골목이 좁아서 인지 6인이 함께 탈 수 있는 택시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먼저 택시에 태워 숙소로 보내고 아이들과 다음 택시를 기다렸다. 축제가 절정으로 향하는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다음 택시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우리 앞으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택시 잡는 어플은 모든 택시가 바쁘다고 먹통이었기에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초조함이 불안한 현실로 바뀌려던 그즈음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앞과 뒤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손을 저었다. 택시는 몇몇 사람들을 지나쳐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 내가 아가를 매고 있어서 우리 한테 오나 보다' 안도와 함께 택시 문을 열려는 순간... 크림색 플라멩코 드레스를 입은 스페인 아줌마가 표독스러운 얼굴을 들이밀며 나를 막아 세운다.


"내가 먼저 와 있었으니 내가 먼저 탈게!" 아주 당당하게 새치기를 한다.


그때 내겐 피로에 지친 아이가 두 명이나 함께 있었다. 빨리 숙소에 가서 밥도 먹이고 쉬게 해줘야 하는데... 우리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을 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아줌마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애들도 안 보이나? 내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나? 본능적인 모성애와 당혹감에 나도 화가 났다.


"우리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복잡한 감정을 누른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스페인어를 내뱉었다. 난감한 기싸움이 시작되려던 찰나 택시기사 아저씨가 상황을 정리해주신다.


"여기 애들이 있잖아요. 먼저 타라고 하세요!" 이 말끝에 스페인 아줌마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러섰다. 택시에 앉아 내 가슴팍에서 눈을 깜박이는 아이를 내려다보니 왠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피로에 기운도 없고 플라멩코고 나발이고 정나미가 떨어지려 했다. 축제 부스 출입거부 부터해서 예쁜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아줌마의 무자비한 새치기까지 2 연속 어퍼컷을 맞다 보니 이곳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란 생각에 가슴이 시렸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저 멀리서도 아이들을 보고 달려왔는데 바로 옆에 있는 아이들 조차 안중에 없던 그녀...


나는 서늘한 가슴으로 또 배웠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스페인에 있지만 어디에 있는가 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플라멩코지만 그런 표독스러운 눈을 가진 플라멩카라면 사양하겠다고...

어디에서 뭘 하든 자상한 눈으로 아이들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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