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몬순 Jul 22. 2019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여행이 끝난 후 D+69일]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길래 낮에 읽다 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펼쳤다. 웬일인지 초반에 그냥 읽어 넘겼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다시 눈이 갔다. 천천히 소네트를 읽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러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임종의 순간을 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상상한 것이지만 마치 영상을 보듯 또렷이 그려졌기 때문에 보았다는 표현도 이상하지 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 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이 지고 암흑의 밤을 맞기 전 황혼이 드리우는 순간. 나의 젊음이 다 타버리고 남은 재 위에서 마지막 불꽃이 껌뻑이는 순간. 죽음을 앞둔 순간의 나는 어떨까.


그때의 나는 낯선 우리 집, 내 방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나. 그때의 나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생이 순식간에 지나갔구나. 이번 생 참 감사했지만 아이들 곁을 떠나는 것이 슬프구나. 이렇게 금방 갈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걸 그랬구나. 죽음이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다면 더 잘 살아 볼 걸 그랬구나.


먼저 가 계신 부모님도 곧 보겠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그 마음 더 헤아려 드리고 더 오래 함께 해 드릴 걸 그랬구나.


깨지 않을 잠에 들고 나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늘 그랬던 것처럼 '순리'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까. 육신의 껍데기에 담겨있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바닷가에 태워 올린 등불처럼 죽은 몸뚱이를 벗어나 하늘 위로 훨훨 나르게 되는 걸까. 그러다 우주에 다다르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우주를 한 큐에 만든 창조주가 준비한 또 다른 핑크 빛 우주에 모여 한 줌의 빛을 발하는 별이 될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금방이니 매 순간 즐기라고. 더 사랑해 주고 더 아껴주라고. 천사들과 멘탈 탈탈 털려가며 정신없이 지내는 지금이 행복한 거라고. 더 크면 자주 못 보니 지금 많이 봐 두라고. 그리고 부모님께 잘하라고...


삶이 불꽃처럼 타오를 때는 정신이 온통 타오르는데 쏠려 스스로가 재가 되는 순간을 생각하기 어렵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만 알았지 실제 나의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한가 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이 새벽에 나를 울릴 줄이야...


여행을 가기 전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많이 그리워하셨었다. 언젠가 할머니와의 재회에 대한 기대를 담은 시를 지어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어쩌면 아버지는 그때 스스로 황혼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쌍둥이들과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다 하신 아버지의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여행을 하면서 다 보고 느끼고 그 경험을 몸에 새겨 기억한다 하셨다. 현실적인 문제로 아가들과 함께하는 산티아고 길 걷기는 산티아고 길 관광으로 바뀌긴 했지만 아버지의 바람은 나의 버킷 리스트와 함께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쌍둥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아가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던 아버지. 여행 중 휴대폰을 잃어버리신 이후에도 무거운 노트북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겹쳐져 가슴이 아린다.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 앞에서




이전 15화 단조로운 일상의 진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