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나를 기억하자
[여행이 끝난 후 D+85일]
너무 힘들 때는 글을 쓰면 안 되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자리에 들고 평소보다 아침을 조금 더 든든히 먹어야 했다. 최대한 마음을 여유롭게 갖도록 노력하며 일이 더뎌지더라도 차분히 해야 했다. 다 잘해야지 하는 욕심을 덜어내고 다 잘할 수는 없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여 줘야 했다. 달달한 아이스커피로 당을 보충해 주며 조금 더 어깨를 펴고 걸어야 했다.
나는 지금 생의 절정을 지나고 있다.
나를 태우며 새로운 불꽃을 피워 올리는 놀라운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그리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위인은 결코 못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자리에 있으니 내가 인지 하지 못하는 순간에 내가 나를 태우고 있다.
때때로 버거울 때가 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위로가 된다.
작년 이 맘 때가 생각난다. 쌍둥이 임신 막달에 기록적인 폭염으로 나는 대체로 집에만 있었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강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문자 그대로 혼. 자. 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 안에 세 개의 심장이 뛰고 있었고 세 개의 영혼이 함께 있었고 빅뱅의 순간을 기다리는 두 개의 신생 우주가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의 절정을 지나며 나는 날 것의 피로와 고통, 이 세상 것이 아닌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깊이 느끼고 기록하리라 다짐했었다. 날 것의 피로와 고통이 엄습할 때면 이러한 다짐은 곧 잘 잊혀지곤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쓰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나는 종종 지난 3월에 은퇴한 이치로 선수의 은퇴 기자회견을 떠올린다. 그는 화려한 때보다 포기하지 않은 순간이 더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무대 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한 공연을 했던 나 보다 입덧으로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었던 시기를 잘 견뎌내고 힘에 부치는 세 아이 육아기를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더 자랑스럽다.
지난 여행도 그렇다. 우여곡절 많았던 우리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행 공항에서 가족사진을 찍어 주던 카메라 뒤의 내가, 그 어떤 멋진 여행 사진 속의 나 보다도 자랑스럽다.
이 사진을 찍어주던 그 날의 나를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내 본다.
여행 중에도 요즘처럼 피로에 허덕였지만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홀로 마음 졸이며 발을 동동거릴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과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서릴 때 가장 행복했다고
나를 태우며 주변을 밝히는 일은 생각보다 멋진 일이라고
힘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