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소설 #방도현차사 #잔상
짙은 먹구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빗방울이 바닷물에 닿아 조그마한 기포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물방울은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바다 위뿐 아니라 부둣가의 컨테이너와 땅바닥에도 잔잔히 떨어지고 퍼져나가고 있었다. 주황색 불의 가로등만이 인적이 없는 부둣가에 묵묵히 자신의 주변만을 비추고 있었다.
"이봐 최형사 오늘 오는 거 맞아? 쥐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제 정보원 말이 확실했어요. 그리고 관련 정보들도 직접 제가 다 발로 뛰어서 일일이 다 확인했다고요. 언제는 제가 남의 말만 듣고 움직였어요? 도현이 형?"
어둡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주변의 빛들로 간간히 보인 사내는 며칠 째 잠을 못 잔 듯 진한 다크 서클이 짙게 깔려있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가 가장 아낀다는 낡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그 검은색이 매섭다 못해 강렬한 그의 눈빛을 더욱 부각해주는 듯하였다. 방도현은 담배를 하나 꺼내어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였다.
"그래. 네놈은 내가 잘 알지. 그런데 대체 정보원이 누구야?"
"에이. 알면서. 그런 건 아무리 친해도 말 못 하죠"
"이야.. 우리 사이가 그 정도였냐? 서로 집 숟가락 개수까지도 아는 사이인데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죠. 아무튼 이번 사건만 잘 마무리하면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형님"
최형사는 이빨을 쓰윽 내밀며 웃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휴 알았다. 이 지겨운 놈. 이러니 반장이 너만 예뻐하지. 나중에 출세해서 나보다 빨리 진급하면 나한테는 쉬운 사건만 빼주라. 알았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니깐 크크"
최형사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방도현의 말에 웃으며 대꾸하였다.
"아이 지겹다 못해 징그러운 놈" 방도현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의 주먹으로 살짝 최형사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이윽고 컨테이너에 비추던 은은한 가로수의 빛을 뚫고 진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빛이 나오는 방향으로 돌아보던 최형사는 황급히 방도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아무래도 저 놈들인 거 같아요. 일단 거래 현장을 급습해야 하니 제가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형님한테 신호를 보낼 테니 지원 요청 해주세요."
"우리 둘이서는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요즘 같은 때에 윗선에게 대규모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납득할 만한 정보는 아니니 감수해야죠."
최형사의 말이 맞았다. 몇 해전 대규모 마약거래 소탕 작전으로 마약 거래는 사그라들었고, 재작년부터 연쇄살인사건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78명을 전국에서 살해하고 도망 다니는 정두영이라는 살인마였다. 그간 신출귀몰한 그로 인해 번번이 그보다 한 발이 늦었던 경찰 수뇌부가 골머리를 앓고 온 국민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렇게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데 온 경찰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동안 잠잠하던 마약거래가 조금씩 소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동안 사건이 없어 여유가 많았던 마약수사팀이었지만 의외로 소규모로 발생되는 마약 거래를 덮치려 하였지만 죽을 쑤었다.
그러다 최형사가 최근 거래 정보가 또다시 발생한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입수한 것이다.
최동진. 항상 계절과 상관없이 그의 아버지가 20대 때 사주셨다고 하는 검은 재킷을 늘 입고 다녔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와 같은 경찰이었고, 그 할아버지까지도 경찰이었던 3대째 경찰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한창 현역이던 시절, 당시 전남 지역을 들쑤시고 다니던 도끼 살인마를 그의 아버지가 체포하였고, 그날 입었던 옷이 바로 최동진이 입고 있는 검은 재킷이었던 것이다.
방도현은 그보다 10년 선배였고, 그가 처음 부임한 날부터 방도현은 그를 부사수로 데리고 다녔다. 방도현은 말이 없는 편이었으나 최동진은 서글서글한 편이라 점차 시간이 흐르며 서로 조금씩 가까워지게 되었다. 서로의 기념일도 챙겨주고 밖에서는 각자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까지 하는 하나의 가족이 된 것이다.
어느 날 최형사가 방도현을 몰래 불러내었다.
"형님 아무래도 정두영 사건 쪽으로 쏠리면서 마약 거래가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지. 그런데 지금 상황이 잔바리들을 수사할 수는 없잖.."
"그야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번에 제가 입수한 정보를 보면 이 소규모 거래가 잔바리가 아니라 한 곳에서 작게 보이려고 여러 명으로 나눠서 하는 연결된 대규모 거래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흘 뒤에 거래가 있는데 거기에 중간 관리자가 나온다고 해요."
"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냈냐? 대단한 놈"
방도현 차사는 담뱃불을 붙이다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반장님께 어서 알려야지"
"그런데 문제는 우리 쪽에 누군가 부패한 거 같아요. 그래서 소규모 거래도 잘 안 잡히는 것 같고요."
"그래? 우리 중에 누가 그런 짓을..."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는 믿을 사람이 형님 밖에 없으니깐."
"설마 우리 중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반장 형님이야 형수 쪽이 집이 워낙 부자라 내년에 은퇴하고 장인한테 상가 건물 받아서 낚시나 다닌다고 하고, 우리 배동진 형사는 줄을 잘 잡아서 올해 유일하게 승진했잖아. 앞으로 탄탄대로인데 뭐 하러 그런 짓을.. 우리 팀 막내는 그런 풋내기가 뭘 안다고 그러겠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허나 저는 형님밖에 믿지 못해서요. 그러니 일단 우리 둘이 현장을 급습하고, 바로 지원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그러니 형님 이 사실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최형사의 진지한 눈빛에 방도현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너.. 그렇게 까지 해야겠냐? 괜히 우리끼리 나섰다가 위험해질 수도 있..."
"형님. 우리는 형사고 나쁜 놈들을 잡아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리고 형사는 원래 위험한 직업이고.."
"하지만.."
"정 내키지 않으시면 저 혼자라도 잡겠습니다."
한동안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최형사는 언제나 그렇듯 또렷한 눈망울로 방도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어딜 형을 노려보고. 그러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방도현은 갑자기 너스레를 떨며 장난스럽게 한 쪽 팔로 최형사의 목을 감싸 졸랐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형님.."
최형사도 그제야 웃으며 함께 장난치듯 방도현의 팔을 떼내려 하였다.
"그래서 너희 둘은 오늘 수색을 빠지고 연천 부둣가로 간다고? 상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반장은 잔뜩 흥분한 채 소리를 쳤다. 방도현과 최동진은 열중 쉬어 자세로 고개를 든 채 입을 꽉 다물었다.
하필 그날은 해당 권역에 정두영에 대한 신고가 들어오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전 날 밤, 인근 지역에서 정두영이 또 한 차례 살인을 시도하였는데 간신히 도망친 여성이 신고를 한 것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던 그가 이번만큼은 실수를 하며 처음으로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단서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전병력이 그를 찾는데 총동원이 되다 보니 반장으로선 그들의 요청이 탐탁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아.. 이 새끼들. 그래 니들 꼴리는 대로 해. 지원은 없으니 알아서들 북 치고 장구치고 하고 잡아오든지 말든지 하라고!!"
팀장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흐음...."
잠시 요 며칠 간의 일을 생각했던 방도현은 반대편 컨테이너 쪽으로 넘어간 최형상의 손짓을 보게 되었다. 마약거래가 맞으니 지원 요청을 하라는 그의 신호였다.
"후우... 동진아... 동진아."
방도현은 조수석의 가시방을 열어 권총을 꺼내어 실탄이 들어있는지 탄창을 점검하였다. 그는 문을 열고 나와 공중에 공포탄을 한 발 쏘고 거래를 하고 있던 사내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거래를 하고 있던 검은 정장의 남성들은 깜짝 놀라 총소리가 나는 방도현 쪽을 바라보았다. 최동진은 갑작스러운 방도현의 돌발행동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들고 나와 그들을 겨누며 나타났다.
"모두 꼼짝 마. 경찰이다."
또다시 반대편에서 최동진의 고함과 함께 나타나자 검은 사내들은 잠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최동진이 외쳤다.
"모두 손들어! 어서!!"
검은 사내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말에 양손을 조심스럽게 올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간의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눈 안 깔아? 이 새끼들아."
어느새 방도현이 최동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지원요청은 했어요?"
최동진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탕" 소리와 함께 방도현은 아무 말 없이 총을 그의 다리에 발포하였다.
"으악..." 최동진은 총을 떨구며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 아니.." 그는 신음과 함께 방도현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기 시작하였다.
검은 사내 중 한 명이 쓰러진 최동진과 방도현 앞에 다가섰다. 턱선이 매우 날렵한데 비해 새까만 턱수염이 얼굴을 뒤덮어 조금은 턱 끝이 조금은 둥글게 보였다. 이마에서부터 눈 아래로 이어지는 알 수 없는 흉터와 그 사이에 의안을 낀 뿌연 눈알은 그를 매우 매섭게 보이게 하였다.
"흐흐 경찰 나부랭이 새끼가 지원도 없이 여기를 함부로 나타나. 아.. 방형사도 경찰이지. 흐흐 미안."
다소 묵직한 목소리로 비꼬듯이 그 사내는 내뱉었다.
"내.. 내가 말했잖아. 오늘은 나오지 않는 게 좋..."
"좀 닥치세요. 방형사님. 오늘 그.. 뭐야. 정두영인가 뭔가 하는 그 새끼 잡느라 경찰 병력이 총동원된다고 하는데 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날립니까? 이게 얼마짜리 거래인데?"
남자는 순식간에 웃음을 거두고 방도현을 노려본 채 말하였다. 그는 이윽고 전화기를 품 속에서 꺼내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간간히 긴장이 된 듯한 목소리로 극 존칭을 붙이는 것을 보니 그의 보스에게 전화를 하는 듯하였다. 한참 뒤, 전화를 끊더니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방도현에게 말하였다.
"우리 형님께서 실망이 아주 크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돈을 처발라도 형사님 서비스가 이것밖에 안되냐고 하시면서요. 만회할 기회를 드린다고 하네요. 저기 자빠져 있는 형사를 방형사님이 직접 죽이시랍니다."
그는 씩 웃으며 턱으로 최형사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뒤에 서있는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저기 형사님 돌아가시면 고이 바닷물에 묻어드려라"
"아니 그렇다고 주.. 죽이기까지 할 필요.. 으악"
어느 틈엔가 중간 보스로 보이는 남자가 방도현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였다. 순식간에 날아온 그의 매서운 주먹에 방도현은 고개가 심하게 꺾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그 사이 그 역시 권총을 꺼내어 방도현을 겨누고 있었다.
"형님이 안 그래도 요즘 방형사가 굼떠서 거래처를 다시 뚫어야 하지 않냐고 해싸. 습. 니. 다. 내가 그거 막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또 실망시키실래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방형사님이 직접 동료를 죽이시고 쓸만한 사람이라고 증명할 건지, 아니면 그냥 여기서 같이 뒈지시던가?"
그의 총구가 날카롭게 방도현의 이마를 조준하고 있었다. 방도현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잠시동안 쓰러져있는 최형사와 그의 총구를 번갈아 보고는 방도현은 떨리는 손으로 최형사에게 총을 겨누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