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내가 두 번째 프로그램을 그만둔 지 삼일째 되던 날, 월요일이었다. 2018년 새해가 밝은 지 삼주 차에 접어든 날이었다. 그날의 전날, 그러니까 직전의 주말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나는 주말 내내 해방감을 만끽했고, 신촌 메가박스에서 영화 코코를 보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렸고, 일을 그만둔 보상으로, 단 며칠이라도 스페인 여행을 가기 위해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모든 것이 희망으로 가득했고, 왠지 2018년은 더 열심히 멋지게 살아내리라는 기대로 부풀었다. 찬란했다.
그러나 인생은 인생만의 계획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 걸려온 뜻밖의 전화에 나는 뒤통수가 차갑게 얼어버렸다. 살면서 그토록 얼얼하게 뒤통수를 맞아본 적이 있던가.
엄마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 길로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모와 이모부가 나를 데리러 역에 나와있었다. 침통한 둘의 표정에 무언가 상황이 심각한가 싶었으나,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 오는 날의 경주는 또 아름다웠다.
"민아, 마음 단단히 무래이"
이모가 전에 없던 서글픈 표정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서글프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로, 그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물이 고이게끔 만드는 지독한 표정이었다. 쿵, 뒤통수를 한번 더 세게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그 표정에 압도된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학병원 장례식장 별관으로 들어갔다. 공허함과 북적거림이 한데 어우러져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았다. 슬픈 냄새였다. 그중엔 복도에 널브러져 목놓아 울고 있는 여자도 보였다. 모르긴 해도 참 기구한 사연인가 보다 싶었다. 단지 나는, 왜 중환자실에 가지 않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선 건지, 이 끔찍한 공간을 통해야만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이모부의 굽은 등을 따라 어떤 한 방에 들어섰다. 엄마가 보였다. 엄마의 머리에 꽂힌 흰색 리본과 하얀 마스크가 보였다. 하얀 마스크 위로는 다홍빛으로 물든 엄마의 눈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어떤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나만 붕 떠있는 것 같았다. 엄마를 보고 그제야 방을 둘러보는데, 거짓말처럼 아빠의 모습이 사진에 고이 박혀 있었다. 얼마 전, 부부동반 모임으로 친척들과 제주도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나와 닮은 눈으로 아빠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와의 이별을 준비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빠는 나의 작은 영웅이었다. 가난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고, 엄마와 나를 끔찍이 아끼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 항상 내 기저귀를 갈아주고 늘 목마를 태워주며 철 지난 노래를 흥얼거리던 사람이었다. 멀미 때문에 자주 토를 하던 내가 걱정돼, 얼마 전까지도 집을 나설 때면 혹시 모른다며 검은 봉지를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내가 경주에 가는 날이면, 늘 역까지 마중을 나왔으며, 꾸깃한 쌈짓돈을 엄마 몰래 쥐어주던 사람이었다. 늘 책과 신문을 끼고 살았고 글 쓰는 걸 좋아했으며, 일요일마다 갖은 야채를 넣어 라면을 끓여주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우리 딸 자랑을 하러 동창회에 나가고 싶다며 통통한 눈으로 웃음 짓던 사람이었다. 가끔 전화를 해도, 혹여나 바쁜 딸이 귀찮아할까 봐 짧은 애정표현만 하고 얼른 자라고, 본인은 건강하고 잘 지낸다고 얘기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