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_그대로 하면 재미없잖아?

위에서 시키는 일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당신에게

by 옆집여동생

회사의 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실제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거나, 관리하거나, 유지 보수하기 위해 행해지는, 흔히 ‘실무’라고 불리는 일들이 있고, 그 외에 오천 오백만 가지 짜치고 다양한 일들이 존재한다. 그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보고’ 업무이다. 열명 스무 명 정도의 스타트업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조직이라면 보고 업무는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윗분들은 도대체 얘네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고, 또 그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한 후에도 결과 보고를 하지만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허락을 받기 위해, 또는 방향성을 결정하기 위해서 보고는 필수적이다. 회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켜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내용으로 보고 장표를 채워서 가더라도 그 일을 그대로 하게 되는 기회는 흔하게 생기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바꿔봐’, ‘이건 빼고 이 기능을 넣어봐’, ‘아예 처음부터 새로 가져와’라는 피드백이 쏟아지는데, 더 큰 문제는 그런 피드백을 내가 직접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프로젝트일수록 나에게 최종 피드백을 주는 분들은 아득히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피드백 자체가 아주 상세하고 직관적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보통 윗분들의 코멘트는 상세하지 않다. 느낌적인 느낌을 중요시한다. ‘요즘 AI가 난리인데 ChatGPT처럼 똑똑하게’, ‘애플처럼 심플한데 화려하게’, ‘MZ들도 좋아할 수 있게’와 같이 나도 모르게 ‘뭐 어쩌라는 거야?’란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다반사다. 더군다나 여러 단계를 거쳐서 내려오는 도중에 메시지가 변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회사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피드백을 잘 녹여서 실무에 적용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적으신 듯한 코멘트를 기반으로 우리가 가진 리소스와 장점, 현재 트렌드 등을 고려하여 어떻게 풀어낼까를 손에 잡히는 형태로 해석해서 가져가는 것 말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내려온 가이드의 방향성이라도 납득이 가면 괜찮겠지만, 도대체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건지, 진정 이 방향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여러 빵들을 좋아한다. 요즘 인기인 소금빵부터, 메론빵, 앙버터브레드 등 서양의 빵들과는 결이 다른 일본만의 해석을 거친 빵들이 꽤 많기도 하고, 가끔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유명한 빵집들을 투어 하는데,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만드는 빵들의 퀄리티가 꽤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본식 빵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아하게 우리식으로 한 번 만들어볼까?’ 하면서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난에 시달리던 중, 미국이 원조로 제공한 밀가루를 가지고 빵을 만들었는데 거친 식감과 효모 향 등으로 사람들이 싫어하자 ‘일본인 입맛에 맞으면서도 밥보다 배부른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팥을 넣어 든든한 앙팡

빵에 면까지 넣은 탄수화물 덩어리인 야키소바빵

빵을 튀겨 칼로리를 높인 고로케


배부름을 위한 빵 이 외에도 일본인의 선호를 더해 거칠고 담백한 서양빵과는 다른 푹신하고 달고, 효모의 향이 적은 방향으로 일본식 빵의 스타일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달래려다 생긴 창의력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단순히 ‘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다시 또 직장인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성격상 회사생활에서 가장 스트레스받을 때가 “도대체 왜 이걸, 왜 이런 방법으로, 왜 이때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납득이 되지 않을 때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1년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런 지시가 있을 때 ‘넵, 알겠습니다’ 하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그 사람만의 노하우이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향상 나처럼 why? 가 해소가 안되면 일하기가 어려운 성격이라면, 위에서 내려온 일이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면, 살짝의 재해석을 거쳐서 ‘그래도 이정돈 해볼 만하다’는 새로운 안을 가지고 다시 방향을 제시해 보자. 소위 ‘리더십 레벨’에서 뭔가를 시킬 때 ‘토씨하나 틀리지 말고 똑같이 해와’라기보다는, ‘이 방향이 좋을 거 같은데 너네들이 제대로 더 고민해서 구체화해 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핵심만 지키고 나머지는 나만의 해석을 더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다. 빵을 시켰는데 빵이 아닌 밥을 가져가는 것만 아니라면, 나름의 해석을 거친 새로운 빵을 한 번 가져가보는 것도 은근히 먹힐 때가 많더라는 개인적인 경험담이다. (물론 100프로는 아니다.)


가끔씩 일본에 갈 때 종종 사 먹는 단팥빵이 있는데, 바로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150년 된 긴자의 기무라야 단팥빵이다. 초기 일본 빵은 짠맛, 신맛이 강해 일본인에게 생소했는데, 벚꽃 잎을 넣은 술종 효모로 반죽하고 팥앙금을 속에 넣어 친근하게 재해석한, 일본식 빵의 시초 같은 빵이다.


내가 만든 회사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만 할 수도 없는 곳이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나만의 효모로 납득 안 가는 상사의 지시를 발효시키고

달콤한 팥앙금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그래도 나름의 성취를 느끼며 할 수 있는 일로 정성껏 반죽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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