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된 세상에서 고유한 색을 찾는다는 것은
장강명 작가는 스스로를 ‘월급사실주의 소설가’라 칭하며, 2011년 『표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로 작품에서 다루는 것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문제들인데요.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같은 작품들이 그렇듯, 시대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이를 문학으로 고발하는 ‘탄광의 카나리아’ 역할을 자처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표백』은 바로 그 시작점에 놓여 있는 작품이고요.
『표백』은 소위 ‘스펙 좋은’ 다섯 명의 젊은이가 모여 5년 후 차례로 자살하기로 약속하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극단적인 행동의 배경에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Great Big White World)’라는 허무하고도 완벽한 세상이 있는데요. 소설의 화자가 바라보는, 자살의 주동자, 세연이라는 인물은 그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새로운 획을 그을 수 없는, 이미 완성된 흰색의 도화지였습니다. 혁명도, 위대한 업적도 모두 기성세대가 이뤄낸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렸죠. 젊은 세대에게 남겨진 역할은 그저 기성세대가 그린 밑그림을 따라 붓질하는 ‘유지·보수자’의 삶뿐입니다. 이들은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느냐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다채로운 생각과 야심을 모두 지워버려야만 했고, 세연은 그 과정을 ‘표백’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반복된 실패와, ‘패배의 길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화가 많이 나는’ 삶 속에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을 지워나갑니다. 세상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답을 찾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세상에 대한 세연의 절망은 극에 달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살을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야유’로 정의하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어 세상의 개념을 바꾸고자 합니다.
그녀의 자살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하나의 사회적 선언이자, 이 완벽한 세상에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청춘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사회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지려 한 것이죠. 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불편한 질문에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이 우리를 향해 '왜 사느냐'라고 물을 때, 그 대답이 오직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일’에만 국한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소설 속 화자는 세연의 자살 선언에 대해 조용히 반론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종으로서 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이죠. 저는 이 문장이 이 소설이 던지는 허무와 절망의 파도 속에서 유일하게 건져낼 수 있는 구명조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늘 ‘거대한 무엇’을 꿈꾸도록 학습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이전 세대들의 거대한 업적 앞에, 우리의 삶 또한 그에 비견될 만한 ‘위대함’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주인공의 말처럼, 우리 앞의 세대들도 결국 ‘가방 하나 들고 해외 출장 나가고, 밤새워 일하고, 거리에서 돌 던진’ 수많은 개인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거대한 역사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연의 야심은 ‘어린아이다운 것’이었다는 휘영이라는 기자가 된 친구의 지적이 마음에 깊게 와닿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닌,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토록 위대한 일을 갈망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표백’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과도한 야심이 좌절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사회적 구조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청춘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하지만 그 끝에 저는 조금 다른 사유를 해보게 됩니다. ‘완성된 사회’는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무의미하다 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가치는 ‘무엇을 성취했는가’라는 거대 담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따뜻한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는 그 지극히 평범하고도 작은 순간들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표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신, ‘위대해지려는 욕망’을 벗어던지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조용히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는 그런 것들로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 주인공의 말을 빌어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고 싶다 합니다. 세연과 그 일당들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자살할 뜻을 모으려는 와이두유리브닷컴(www.whydoyoulive.com)이란 사이트에 대한 대답으로 디스이즈더리즌닷컴(www.thisisthereason.com)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살아갈 이유’라고 말해주는 사이트.
삶의 이유는 거대한 진리와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작은 행동과 의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색이 희미해져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빛나는 고유한 색깔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표백’의 시대에 맞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싸움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