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서진 덕분에
집안일이라고는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던 아버지에, 아들만 둘 키우시는 어머니께 자그마한 위안이 되고자 어려서부터 딸 역할을 자처했던 것 같습니다. 본가에 가끔 들러 기울이는 술잔에, 어머니께서 안주거리 삼아 어릴 적 불평불만 없이 설거지며 심부름을 곧잘 해내더라며 기특함을 꺼내보이시는 걸 보면.
경기도 화성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고모댁에 찾아가 종종 방학을 나곤 했습니다. 방학에 시골을 갔으니 안 되는 콧소리에 애교를 엮어 아양이라도 떨면 좋았으련만. 딸을 자처하는 아들은 농사일 거드는 것도 열심이었고, 고양이 손도 모자랄 판이라 고사리 손마저 농사일에 동원됩니다.
그 시절 고모와 고모부는 벼농사, 고추농사, 무농사에 돈이 된다고 담배까지 재배하시던지라 늘 바쁜 나날을 보내셨죠. 와중에 어린이들이 농사일을 도와봐야 뭘 얼마나 돕겠습니까. 잡초나 뽑고 채소나 따는 노역에 동원될 뿐이죠. 해는 왜 이리 빨리 뜨고 오래가는지. 날은 또 왜 그렇게 더웠는지. 어르신들이 '아이고 허리야'라는 말을 달고 사는 이유를 몸소 깨닫습니다.
덕분에 잡초만 봐도, 잡초 소리만 들어도 트리거가 동작하는지 다 큰 지금이 되어서도 움찔움찔합니다. 어딘가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존재, 뽑아내고 없애야 할 대상. 그 어린 시절, 어린이에게 모욕감이 아닌 땀 맺힌 노동의 고됨을 주었던. 그렇게 제게 잡초는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빅토리아 베넷의 『들풀의 구원』을 처음 만났을 때 묘한 반감이 들었습니다. 들풀이 구원이라니, 들풀이 구원을 한다니. 잡초가 무슨 구원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책장을 넘기며 조금씩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베넷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제가 어린 시절 뽑아내던 그 잡초들과는 다른 시선이 있었거든요.
이 책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지나쳤던, 아니 애써 외면했던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쓴 이 에세이는 단순히 들풀로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실과 고통으로 부서진 땅에서 다시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한 사람의 깊은 회고록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늘 제 삶을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만들려 달려들지 않았나 살피게 됩니다. 계획은 완벽하게, 불필요한 일들은 솎아내며, 아름답고 쓸모 있는 것들로만 채우려 한 것은 아닐지. 어린 시절의 잡초가 제게 남긴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제 삶에 끼어드는 무언가 쓸모없는 것들, 계획 밖의 일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잡초를 뽑아내듯 그런 불편한 감정들 또한 뿌리째 뽑아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관리하고 싶었던 삶의 정원에 예측할 수 없는 상실과 좌절의 순간들이 엉겨 붙죠. 불쑥 돋아난 쐐기풀처럼 찌르기도 하고 뽑아내려 할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는 망초처럼 제 삶을 잠식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그 잡초들이 너무 무성해져 제가 심어놓았던 꽃들을 가리는 것만 같아 절망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빅토리아 베넷의 삶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정원 또한 척박하고, 부서지고, 상실의 흔적으로 가득했습니다. 언니의 죽음, 아들의 지병, 그리고 가난이라는 현실은 그녀의 삶을 온통 돌무더기와 폐허로 만들었죠. 그럼에도 빅토리아 베넷은 그 땅에 들풀을 심습니다. ‘이 교란되고 망가진 땅에서도 무언가 자랄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요.
이 믿음은 저의 오랜 기억을 뒤흔듭니다. 잡초는 무조건 뽑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경이로운 존재다라고요. 베넷은 이 존재들을 통해 삶의 덧없음과 동시에 영속성을 이야기합니다.
꽃을 피우는 구근이 하나 있다면 썩어버리는 구근도 하나 있다는 것, 싹을 틔우는 씨앗이 하나 있다면 엘더나무에서 기다리는 새들이 먹어버리는 씨앗도 하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다면 그냥 심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라리라고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이 문장으로 어떤 깨달음과 마주합니다. 삶이란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 것. 꽃을 피울 씨앗만 심으려 애썼던 저에게 썩어버릴 구근과 새에게 먹힐 씨앗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문장은 커다란 해방감처럼 다가왔습니다. 더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저 주어진 순간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작은 생명들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니,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숨 쉬던 또 다른 문장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행복의 봉우리란 없고,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도 없다는 말. 그저 어지럽고 끔찍하고 아름다운, 이 삶뿐이라는 고백. 그 문장을 소리 없이 따라 읽다 보니 오래도록 오해해 왔구나 싶습니다. 내 삶의 지도를 산맥처럼 그려놓고 정상에 닿아야만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겠다고 다짐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봉우리는 실체가 아니라 환상에 가까웠고 내가 설 자리는 먼 정상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지금 딛고 있는 흙이었다는 걸요.
이후로 저는 '지금'에 자주 귀 기울이려 합니다. 내 호흡이 드나드는 소리, 살갗이 미세하게 떨리는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탄생의 첫 숨과 죽음의 마지막 숨 사이, 들숨과 날숨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 거창한 명상가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여기에 있는 나를 인정해 보려는 시도. 짜여진 계획표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의 리듬을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입니다.
부모로서의 마음도 거기서부터 달라졌습니다. 내가 충분히 잘하지 못할까 봐, 내 결핍이 아이의 맑은 부분을 훼손할까 봐 많이 두려웠죠. 그런데 돌아보니, 아이는 내게 ‘다른 부모’가 되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 헝클어진 가장자리까지도, 아이에게는 밑거름이 되리란 걸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이는 제 길로 떠날 것이고 이를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아이가 내 손 위에 얹어오는 그 온기 만은 확실합니다. 서로를 놓지 않으려 붙잡고 있는 시간. 떠나보내야 함을 알면서도 붙잡고 있는 마음. 이 모순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베넷은 스스로를 ‘정원사’로 부르기를 망설였습니다. 제때 심지 못하고, 심어야 할 곳에 심지 못하고, 모르는 채로 우연에 기대어 가꾼다고. 하지만 그 겸손이 좋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하루도 그렇지 않을까요. 제때 피어나야 할 말은 놓치고, 마음은 엉뚱한 자리에 심기고, 관심 없는 대목에 불쑥 감정이 자라나곤 하니까요. 중요한 건 교본대로 가꾸는 솜씨가 아니라 교란되고 망가진 땅에서도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올 한 해는 유난히 힘들었습니다. 안팎으로 작은 부침 있는 일들이 연달아 지나갔고, 내가 심어놓은 것들이 몽땅 쓸려나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책 속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베넷의 정원에는 베넷이 없었는데도, 또 홍수를 겪었는데도 들풀들은 살아남았다는 고백. 헐벗은 당개나리 가지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습지 가장자리에 매달린 꽃창포가 노랗게 피어 있으며, 차갑던 땅을 뚫고 설강화가 먼저 얼굴을 내미는 풍경. 이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일일이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삶은 때맞춰 제 몫의 싹을 틔운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내 안의 잡초들을 함부로 뽑아내지 않으려 합니다. 마음 한편을 거슬러 올라오는 불편함, 예기치 않은 슬픔, 설명되지 않는 두려움 같은 것들. 예전 같았으면 ‘쓸모없음’으로 분류해 뿌리째 뽑으려 했을 감정들. 하지만 베넷은 말합니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고. 다만 그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는 않겠다고. 그 문장을 품으니 슬픔을 정원 가장자리에 앉혀두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들풀들에게 햇살 드는 자리와 그늘지는 자리를 번갈아 주고, 비 오는 날에는 비를 선물처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것.
이제 잡초라는 단어를 들풀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쓸모없음의 이름표를 떼어내니, 내 삶에 끼어드는 우연과 실패와 상실이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때론 상처의 뿌리가 토양을 부스러뜨려 바람을 잘 통하게도 하고,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자란 무성함이 벌과 새를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실패가 실패만은 아니고, 상실이 상실만은 아니라는 사실. 들풀은 그 진실을 온몸으로 가르쳐줍니다.
결국 삶을 완벽히 제초하는 대신 동거의 기술을 배우려 합니다. 번져도 좋은 것과 선을 그을 것을 구분하고, 내버려 둘 것과 다독일 것을 가늠하는 일. 무엇보다도 심고 믿는 일. 살아남을 씨앗이 하나 있다면, 먹힐 씨앗과 썩을 구근도 함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용기. 그 인정 위에서야 비로소 내 일상에도 작은 꽃대가 올라옵니다.
그러니 오늘도 대단한 각오 대신 소박한 의식을 택합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습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아주 짧은 틈에 내 손에 쥔 씨앗을 한 줌 흙에 묻습니다. 그 씨앗이 무엇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의 새벽을 밝혀줄 작은 잎맥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부서짐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덕분에 살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어린 날의 여름, 끝없이 자라나던 잡초는 제게 노동의 고됨과 좌절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들풀은 또 하나를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희망은 땅속에서 시작된다는 것.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자라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보이지 않던 시간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내 삶의 정원에도, 당신의 정원에도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올라오는 초록이 있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을 오늘 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