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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 이디스 워튼

진정한 비극은 어쩌면

by 세잇

차가운 뉴잉글랜드의 겨울, 그곳에는 영원히 해동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은 바로 그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피어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순수의 시대』에서 상류 사회의 위선과 내면의 갈등을 날카롭게 파헤쳤던 이디스 워튼. 이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배경인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마을의 한 남자를 조명합니다. 이선 프롬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삶 속에도 얼마나 깊고 조용한 고통이 자리잡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은 밑줄들은 그 고통의 흔적들을 더듬어 가는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삶이 '선택의 총합'이 아니라 때로는 '포기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선택을 하지만 이선 프롬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거든요.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선택의 가능성이 박탈된 채 오직 체념과 의무만으로 채워져 있을 뿐 아니라 서서히 망가져 가는 과정까지 눈에 담깁니다.


장소: 삶을 가두는 거대한 비석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장소'가 가진 압도적인 무게감이었습니다. 이선 프롬은 공부를 포기하고 병든 부모를 위해 돌아온 스타크필드라는 마을에 갇혀 지냅니다. 그의 삶은 오직 그곳에서만 허락된 듯했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의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이 문장은 이선의 삶을 짓누르는 거대한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의 선조들이 묻힌 묘비는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그에게 속삭이는 과거의 목소리이자 미래의 비석이었죠. 그가 느끼는 조바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이 묘비들이 내뿜는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라는 싸늘한 기운 앞에 매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타크필드라는 물리적인 공간은 그저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선 프롬의 모든 욕망을 가두고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의 캐릭터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지점에 박혀버린 채 그 자리와 장소가 던지는 운명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선은 바로 그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인류의 보편적인 초상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 삶의 가능성을 엿보는 짧은 순간

그런 꽉 막힌 환경 속에서 이선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존재가 바로 아픈 아내 지나의 조카 매티였습니다. 매티는 이선에게 잊고 살았던 삶의 활기,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교감이라는 기쁨을 선물하는데요.


걸어가는 길의 발자국마다 매티의 존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하늘을 배경으로 뻗은 나뭇가지나 둑을 덮은 가시덤불이나 달콤한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은 고요한 가운데 물푸레나무에서 들려온 새 지저귀는 소리가 너무 그녀의 웃음소리 같아 가슴이 죄었다가 다시 팽창했다.


이선은 매티와 함께하며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감각합니다. 그의 메마른 감수성은 매티라는 존재를 통해 되살아났고, 자연의 풍경 하나하나가 그녀의 웃음처럼 들리는 마법을 경험하죠. 하지만 그 마법 같은 순간은 현실의 잔혹함과 대비되며 더욱 애틋하고 슬프게 느껴집니다. 매티를 향한 이선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매티가 다른 사람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의 즐거움은 그에게 무관심으로 다가왔고, 그가 매티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모든 행동과 표정들은 사실 매티가 다른 이들에게도 보였던 평범한 모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매티는 이선에게 '삶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그 가능성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았죠.


절망: 영혼을 묶는 보이지 않는 사슬

이선은 자유를 향한 욕망과 병든 아내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매티가 떠나기로 결정한 날, 이선은 그녀에게 절망적인 고백을 합니다.


“맷,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이선은 '손발이 꽁꽁 묶였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그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 자체가 거대한 사회적 제약과 도덕적 의무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는 매티에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고, 함께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매티의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녀의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극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무거운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자유를 향한 갈망이 깊어질수록 그의 영혼은 더 깊은 고독의 감옥 안에 갇히게 됩니다.


비극: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는 삶

『이선 프롬』의 진정한 비극은 이들이 죽음 대신 선택한 결과로써 완성됩니다. 이들은 함께 죽음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은 가장 잔혹한 형태로 꼬여버리죠.


장례가 끝난 뒤에 지나가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보고 이선은 농장에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나에게 자기 집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가끔 그는 어머니가 겨울이 아니라 봄에만 돌아가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홀로 남는 공포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병수발을 위해 돌아온 후 결국 지나를 놓지 못하고 매티를 잃을까 두려워 함께 죽음을 택했지만 그 결과는 매티의 영원한 병수발을 들고, 지나와 함께 한 집에 갇히는 기이하고 잔혹한 공존이었습니다. 이선에게는 이제 진정한 자유도, 죽음이라는 해방도 없습니다. 그의 삶은 영원히 고통스러운 상태로 멈춰버립니다. 그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채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에서 잔인하게 다가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선 프롬의 이야기를 덮으며 문득 우리 시대의 '스타크필드'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 안정이라는 이름의 틀, 타인의 시선이라는 벽,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한다'는 수많은 의무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스타크필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 이선 프롬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절망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절망을 응시하는 용기,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이겠죠. 이선이 매티와 함께 나눈 짧은 순간들, 자연 속에서 느꼈던 생동감,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삶의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선 프롬과 달리,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들이 항상 쉽거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만의 매티를 찾을 수 있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선의 비극을 통해 오히려 현재 주어진 선택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자유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제한적이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결정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이선 프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두려움이나 관성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선 프롬의 얼어붙은 겨울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봄을 놓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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