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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슈테판 츠바이크

어둠 속에서야 발견하는 작은 별들

by 세잇

잠이 보약이라는데. 언젠가부터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들기까지가 조금 힘들어서, 잠들고 나서도 깊게 잠들지 못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취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천연성분의 수면보조제를 주로 활용합니다만 적응의 동물이라는 인간은 참 무섭습니다. 그래도 1시-6시의 루틴은 지키려고 애쓰며 늘 밤을 건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밤이 좀 무섭습니다. 오늘의 밤은 무탈할지. 침대 밑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는 아니고요 ㅎㅎ


습관처럼 밤을 늦게까지 끌고 가던 날이었습니다. 머리맡에 작게 누운 책 한 권이 있었죠. 제목부터 이미 하루를 비추는 듯했습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에세이들이라 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 브라질 망명지에서 쓴 글이라고요. ‘어두울 때에야’라는 말이 마음을 톡 건드립니다. 늘 밝음을 향해 서두르는 삶에서 조금이라도 어두울라치면 조명을 먼저 찾은 듯한데 츠바이크는 등을 돌려 어둠을 바라보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별은 낮에 안 보이듯 삶의 신성한 가치도 평온할 때는 종종 가려진다고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제 생활의 조명 스위치부터 내려놓았습니다. 어둡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게 아니라고, 어둠은 때로 조용한 눈이 되어 준다고요.


책은 사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안톤. 직업도, 집도 절도 돈도 없이 마을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 안톤에게 오래 머물렀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모두가 그와 악수를 나눈다.' 츠바이크는 안톤에게서 신을 교과서처럼 믿는 삶의 힘을 보았다고 썼습니다. ‘교과서처럼’이라는 표현에 작게 웃었습니다. 교과서 같은 현실은 늘 지루하게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엔 다른 질감의 교과서가 있습니다. 안톤의 교과서는 문장 대신 태도로, 공식 대신 관계로 써 내려간 책이었거든요.


종종 효율과 성과라는 문장으로 하루를 채워 넣습니다. 그날의 성과가 곧 그날의 가치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그러나 안톤의 삶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가치가 성과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해냈는가’보다 먼저여야 한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라서요. 츠바이크는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그 밑줄을 거듭 읽으며, 서랍 속에 든 온갖 명함이며 자격증보다 제 이름을 스스로 보증할 수 있는 태도 한 줄이 더 든든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계속 짚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시대’로 이동합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정말로 세계적 격변을 모두 목격하고 그것에 빈틈없이 참여하고 있을까?' 츠바이크의 물음은 뉴스 알림이 쉬지 않는 스마트폰 화면을 연상시킵니다. 쏟아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따라갈 여력과 참여의식을 우리는 갖추었는가. 저는 솔직히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가고 알고자 하는 욕심과 버거움 사이에서 중심을 잃어가죠. 츠바이크는 여기서 해명을 내놓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요. 이 문장은 변명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적인 모습에 대한 인정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개인의 윤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끝없이 연결된 세상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정하는 것, 그 선을 정하되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자주 손을 얹어보는 것.


그래서 제 삶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채워 넣습니다. 감당 가능한 거리만큼만 가까이 가서 읽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회적인 이슈에 작게나마 참여하기. 주변 사람들의 일상에 조금일지라도 관심 갖기. 그것이 작은 심장이 포기하지 않고 뛰게 만드는 리듬이 되길 바라면서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츠바이크의 이 문장은 냉혹한 관찰이자 따뜻한 위로입니다. 세상은 격랑인데 밥은 여전히 지어야 하고, 신발에 두 발을 꿰고 출근길을 나서야 합니다. 이 문장을 욕망의 속도 대신 생활의 속도로 읽었습니다. 생활은 늘 작은 단위의 반복으로 유지됩니다. 커피를 내리고, 메일에 답하고, 아이의 숙제에 관심을 갖고, 저녁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때로 이런 반복이 지겹고 허무해 보이기도 하죠. 그런데 츠바이크는 말합니다. 일상이 계속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 지탱해 준다고. 전쟁 중에도 개는 산책을 나가고, 시장은 문을 열고, 공연장은 불을 켭니다. 그 평범함은 사치를 가장한 방치가 아니라 파괴에 맞서는 가장 묵직한 버팀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밥을 짓는 손, 그 손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진 못해도 한 사람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는 있으니까요.


그러나 일상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가 삶을 바꿀 때. 츠바이크는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을 말합니다. 결단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주의를 집중하라는 다른 의미의 이름입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의 화면을 닫고, 회의를 줄이고, 오늘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를 고르는 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가다듬지 못한 마음으로는 선한 의지도, 높은 역량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번의 소진을 통해 배웠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 츠바이크는 '우리 함께합시다. 각자의 나라를 위해,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라고 씁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언어로, 서로가 약속한 만큼의 일을 해내는 것. 거창한 선언 대신 매일의 성실로 쌓이는 신뢰.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서로의 일을 신뢰할 때에 ‘명예롭게 의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요.


함께라는 말이 종종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다 같이 하자는 말 뒤에 때로는 공평하지 않은 부담이 숨어 있기 때문인데요. 츠바이크의 함께는 강요가 아닙니다. 각자의 언어,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 참여하자는 요청입니다. 저는 이 각자의 윤리가 좋습니다. 각자가 제 목소리로, 제 속도로, 그러나 동시에 서로의 실패에 등을 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그 연결의 최소 단위는 다정한 말 한마디와 작은 몸짓일 겁니다. 그는 그것이 불행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제목으로 되돌아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제게 이 문장은 ‘불행을 미화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둠을 측정하고 잘 재단할 눈금을 갖추라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밝기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삶은 금세 과장됩니다. 반대로 어둠의 층위를 식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작게 빛나는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산책, 새로 피어나는 식물의 이파리, 늦었지만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며 씻겨 나가는 미세한 후회들. 저는 이 작은 빛들이 어둠에서만 보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낮의 환함은 넓지만 얕고, 밤의 빛은 좁지만 깊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앞세우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안톤이 가르쳐 준 태도죠. 그리고 모든 비극에 반응하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작은 참여. 산만함이 미덕처럼 포장되는 시대에 한 가지로 마음을 모으는 연습.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각자의 언어로 서로를 신뢰하자는 약속.


어둠은 사라져야 할 대상일 수 있지만 때로는 배워야 할 스승입니다. 어둠은 우리를 가만히 앉혀 작은 불빛을 보게 합니다. 츠바이크가 남긴 이야기들은 그 불빛으로 의자를 조금만 돌리자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도 그 의자를 아주 조금, 제 자리에서 당겨봅니다. 삶의 밝기만이 아니라 명암을 함께 조절하는 법을 익히면서요. 그리고 이 문장을 조용히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는 여전히 어두운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말 한마디와 몸짓 하나로 별빛을 나눌 수 있다고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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