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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신호등 없이도 교차로를 건너는 법

by 세잇
어른이 된다는 건 사라진 신호등 없이도 교차로를 건너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유년으로 꾸린 정원이다. 1977년부터 1981년, 인왕산 자락의 바람이 라디오처럼 역사를 흘려보내던 시절, 난독증으로 어리숙해 보이는 국민학교 3학년 동구는 가족과 동네와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간다. 작가는 그 시절의 기억을 황금빛 곤줄박이 페인트처럼 문장에 발라 올린다. 첫 장편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던 작가는, 이 작품이 그녀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말의 온도가 피부에 닿는 온기와 비슷하다. 문장이 어른보다 1도쯤 높은 아이의 체온으로 말한다.


가족의 구조를 보여주는 곳에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을 발견한다.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집안에 그런 사람 하나쯤 두고 있지 않을까. 웃으면 밥상이 환해지는 아이, 울면 사소한 일도 태풍이 되는 아이. 그런데 그 푸른 신호등은 사람보다 먼저 늙거나 더 일찍 꺼지기도 한다. 그때 남는 건 멈춤과 출발 사이를 못 정해 덜컥거리는 가슴소리. 이 문장에 한동안 페이지를 멈추었지. 내가 잃어버린 신호등을 떠올리느라. 그때 알았다. 문장이라는 건 신호 체계를 새로 배우는 일이라고. 손에 쥐어진 작은 푸른 불빛 하나로 내 안의 교차로를 정리하는 일이라고.


동구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자주 부딪힌다. '중요한 건, 동구야,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은 어른들의 일이라는 거야.' 선생님의 이 말은 훈계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실패 확률을 줄이는 지혜에 가깝다. 누군가의 문제를 대신 풀어주려다 더 엉키게 만들지 않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자리에서 돕기를,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싸움이라면 당분간 유예하기를. 아마 성장의 대부분은 ‘참견하지 않을 용기’를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른의 마음을 스스로의 방법으로 헤아리며 곁을 지키는 것. 어른이 된 우리는, 아이의 당시를 미루어 짐작하며 ‘지금 당장’의 해법 대신 ‘나중에 제대로’의 약속을 품는 것.


그러나 아이의 정의감은 쉬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는 엄마가 자기의 엄마를 욕했다고 화를 내지만, 아버지 자신은 내 앞에서 내 엄마를 욕하고 있으니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동구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게 할머니를 욕했다며 화내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정확히 짚어낸다. 아이의 세계에서 모순은 낱낱이 발각된다. 어른들의 세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온갖 변명과 합리화는 순도 높은 정의의 눈앞에 일시 정지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예리한지 실감했다. 소리치지 않고, 곁눈질하지 않고, 그저 정확히 본다. 정확히 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계는 조금 더 좋아진다.


동구네 집에는 두 개의 믿음도 있다. 하나는 뉴스에 기대는 믿음, 다른 하나는 전생을 불러오는 믿음. 모실 할머니는 '전생에 업이 많아 그런 것이니 도를 닦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그 문장에 담긴 마음을 본다. 어쩌면 인간은 견딜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변명할 꺼리를 찾는다. 어떤 사람은 원인을 과학에서 찾고, 어떤 사람은 사주에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 절하는 일상에서 찾는다. 설명은 틀릴 수 있지만 설명하려는 마음은 종종 누군가를 버티게 한다. 작가는 그 마음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처음 알아보는 순간이 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박영은 선생님이 난독증이 심한 동구에게 한 건 특별한 교육법이 아니라 존재의 순서를 바로잡아 준 일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이름표인 ‘덜렁대는 동구’를 떼어내고, 뒤편에 쪼그리고 있던 너를 무대 위로 불러내는 일. 우리는 모두 그런 선생님을 마음속에 한 명쯤 둔다. 어쩌면 그 선생님이란 실재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나를 불러내는 문장, 네가 거기 있었다고 확인해 주는 문장.


영주의 죽음은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죽음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영주의 귓속에서 색깔 어두운 애벌레가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는 환상적인 장면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처럼 느껴진다. 애벌레가 '할머니가 일구어놓은 향기로운 검은 흙'에 고개를 처박는 순간을 읽으며, 나는 정원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다.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시들고 썩고 흙이 되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곳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어야 새로 얻는 것들도 있다.


삼촌의 애도하는 장면도 오래 남는다. 매미 소리가 한순간 멎고, 큰 사람이 어리숙한 곰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눈가를 훔친다. 인간의 위엄은 무표정에 있지 않다. 눈가의 물기를 들키고도 무너지지 않는 데 있다. 어쩌면 동구가 배운 강함은 이 장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강하다는 건, 울면서도 걸어가는 법을 아는 것. 울음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울음을 곁에 두고 같이 가는 것.


동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다. '하루라도 나의 갈 길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문인지 탄식인지 모호한 문장. 나는 이 질문에 내놓은 작가의 대답을 이렇게 들었다. 확신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가꾸어지는 것이라고. 정원사가 물을 주듯 오늘의 망설임과 내일의 작은 용기를 합쳐 한 줌의 확신을 만든다고. 그 확신은 몸에 맞춘 슈트처럼 점점 내게 맞게 재단된다. 남의 확신을 빌려 입는 시절은 밖에서 보기엔 번듯하겠으나 오래 못 가겠지.


소설의 마지막에 동구는 정원을 떠난다. '아름다운 정원의 정경이 차츰 좁아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광채의 선이 되었다가, 갑자기 시야에는 녹슨 철문의 모습만 들어왔다.' 며, 그러고는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어른들의 주문 같다. 떠날 때 감정의 뒷정리를 스스로 해내는 사람들. 섭섭함을 억지로 밀어내는 대신 어디까지가 나의 몫이고 어디부터가 세계의 몫인지를 알아차리는 사람들. 작별이란 마음의 가구를 다시 배치하는 일이겠지. 빈자리엔 빛이 들고, 빛이 들면 먼지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먼지들을 한 줌씩 닦아내는 손놀림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심윤경 작가는 아이의 눈을 빌려 어른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미움과 사랑, 고집과 이해, 가난과 온기가 한 그루 나무의 뿌리처럼 얽혀 있음을, 그리고 그 얽힘 자체가 삶의 장관임을. 그녀의 문장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었고 판단하지 않고 견뎌냈다. 그래서 오래 묵직하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내 안의 정원으로 내려가 작은 잡초 몇 포기를 뽑았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서로의 신호등이 되어주다 사라지겠지.
남은 자는 빈 교차로에 공손히 멈추겠지만
그때 필요한 건 차분한 손동작과
당신이 내미는 그 문장 한 줄.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래서 서로를 건너게 한다. 아이가 어른에게, 어른이 다시 아이에게. 살아 있는 자가 떠난 이에게, 떠난 이가 살아 있는 자에게.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다 한 번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가능한 한 섭섭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 애씀의 기록이 바로 우리의 아름다운 정원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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